2024.05.15 (수)

  • 흐림동두천 6.5℃
  • 흐림강릉 10.7℃
  • 서울 9.1℃
  • 구름많음대전 10.2℃
  • 대구 13.6℃
  • 흐림울산 16.1℃
  • 구름조금광주 12.2℃
  • 구름많음부산 19.3℃
  • 맑음고창 11.9℃
  • 맑음제주 14.2℃
  • 흐림강화 7.7℃
  • 흐림보은 10.6℃
  • 흐림금산 10.0℃
  • 맑음강진군 13.0℃
  • 흐림경주시 15.6℃
  • 흐림거제 17.6℃
기상청 제공

아래로부터 일어난 변화의 열망... 미얀마 땅에도 봄은 오는가

최대 축제인 전통설 띤잔(Thingyan) 연휴를 맞아 물 축제로 떠들썩해야 할 미얀마는, 군부의 잔혹한 폭력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국민들의 원성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총질에 유혈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월 1일 부정선거를 이유로 쿠데타가 발발한 이후 14일까지 무려 715명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결단코 더이상의 희생은 없어야한다. 미얀마의 진정한 ‘봄날의 꽃’은 언제쯤 피어날 수 있을까? 

 

 

미얀마의 원래 국명은 ‘버마’였는데, 1989년 군사정권이 ‘미얀마’로 바꿨고, 2010년 10월 다시 ‘미얀마 연방공화국(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으로 변경하게 된다.

 

미얀마는 1962년 3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래 독재와 인권탄압이 이어져 국제사회에서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로 비난받았었다. 또한 최악의 비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로, 대규모 민주화시위가 발생한 1988년까지 사실상 쇄국정책을 폈다. 

 

장기 독재를 지속한 네 윈(Ne Win) 장군은 민주화시위가 발생하자 퇴진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딴 쉐(Than Shwe) 등 소장파 군부세력이 시위를 진압, 같은해 9월 정권을 장악한 후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 : 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를 구성해 국가를 운영했다.  

 

군부는 이후 치러진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국민연맹(NLD :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에 완패하자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집권했다. 그렇게 딴 쉐 장군은 SPDC 의장으로서 국가 원수, 국방장관 및 군총사령관직을 겸임하며 군사독재를 유지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민주화 압력이 계속되자 “자체 계획에 따라 민간정부를 출범시키고 민주화를 진행할 것”이라면서, 2003년 8월 ‘민주화를 위한 7단계 로드맵’을 발표하게 된다. 그 일환으로 군부는 2010년 11월 총선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는 재집권 20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미얀마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분 건, 지난 2011년 3월이다. 50여년 간 군사독재가 지속돼 온 미얀마에 드디어 민선정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초대 대통령은 떼인 세인(Thein Sein). 국회 간선제를 통해 선출된 그는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개혁·개방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의회 다수당을 차지한데다 각료 대부분이 전직 장성으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무늬만 민간정부’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딴쉐의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이라는 시각도 지배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신정부의 개혁·개방에 별 기대가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떼인 세인의 행보는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광범위한 개혁정책 추진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았다. 수차례 개각을 통해 반개혁적 인사를 개혁파로 교체, 친정체제를 강화했는가 하면 빈곤 및 부정부패 척결로 다시금 미얀마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대통령 정치 자문위원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보면 미얀마 군부가, 떼인 세인이 개혁·개방을 지지한 이유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나라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가는 세계적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개혁·개방이라는 마차에 빨리 올라타지 않으면, 마차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게 미얀마 군부가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에 나서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국민이 기존의 삶을 바꾸고 개선하고 싶어 한다면, 또 국경 밖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열망을 끝까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떼인 세인은 취임 1년 후 가진 의회 최초 연설에서도 ‘미얀마의 민주화 이행은 전 국민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중요한 전환’으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14년 아세안 의장국 수임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결국 미얀마에서 본격적인 개혁·개방이 이뤄진 것은 떼인 세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그를 수지 여사와 함께 ‘2012년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사상가 100인’에 공동 1위로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2016년 3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한 떼인 세인은 딴 쉐 독재 시절 군부내에서 가장 청렴한 인사로 꼽혔으며, 2007년 이후 4년 간 총리를 역임하면서 업무수행 능력을 인정받았다. 물론 그 역시도 군출신이었다. 1968년 미얀마 국방사관학교를 졸업(9기)했고, 1991년 육군참모본부 기획·작전참모를 역임했다. 또한 2004년 과도군사정부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 제1서기를 지내다 2007년 총리로 발탁, 조용하고 성실한 실무형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사실 미얀마가 개혁·개방을 결정하기 이전의 정치·외교적 상황은 부분적으로 북한과 유사했다. 떼인 세인 정부 이후에야 비로소 미국과 EU를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이 미얀마에 가했던 경제제재를 해제 또는 완화하고 외교관계도 정상화했다. 미얀마의 정치적 자유화와 부분적인 인권개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결과였다. 

 

교역이 재개되고 해외 투자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신정부는 출범 이후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환율체제를 정비하고 외국인투자법을 개정하는 등 경제발전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 게다가 미얀마의 성장 잠재력은 국제적인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같은 현상은 대한민국도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주요 대기업의 미얀마 진출이 본격화됐고, 2012년엔 서울-양곤 간 직항로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또 같은해 한국과 미얀마의 두 정상이 상호 교환 방문했고, 2013년 6월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에서 한·미얀마 경제협력위원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때 한국 정부는 향후 5년 간 5억불 규모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차관을 제공해 양곤 인근에 한·미얀마 우정의 다리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렇듯 한국과 미얀마의 경제협력 상징으로 통하던 양곤 달라 지역의 ‘우정의 다리’ 건설 사업은 잠정 중단됐다. 구금 중인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2019년 8월 “미얀마 미래 경제의 토대가 마련됐다”며 기뻐했던 한국토지공사(LH)의 ‘경제협력 산업단지(KMIC)’ 건설 역시 최근 사업 진행을 멈췄다. 현대건설의 ‘양곤 변전소 프로젝트’ 등 나머지 52개 미얀마 건설사업도 거의 다 보류된 상태다.

 

 

15일 현지 매체 이라와디에는 만달레이의 한 사관학교에서 전날 생도들이 띤잔 축제를 즐기는 영상이 보도됐다. 1분 가량의 이 영상에는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수백 명의 생도들이 다채로운 색상의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호스와 물총 등을 이용, 이들에게 물을 뿌리는 장면도 포착돼 있다.  

 

 이라와디는 이 영상에 “2월 쿠데타 이후 숨진 수백 명의 시민 희생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다른 곳에서는 띤잔 축제를 벌이는 것을 거부했다”고 적었다. 민주진영 임시정부격인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도 해당 영상을 공유하고, “민간인들은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데, 군인들은 띤잔 축제를 기념하고 있다”면서 “불법적인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를 침략한 외국 군대에 더 가깝다”고 비판했다. 

 

최근 인구의 약 90% 가량이 불교 신자로, 대표적인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 기독교에서 큰 의미를 갖는 ‘부활절 계란’이 등장했다. 바로 군부에 대한 저항 메시지와 민주주의 회복 의지 등을 새겨 이웃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과거 미얀마의 개혁·개방과 현재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차이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도부의 선택에 따른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일반 시민들의 의식 전환을 유도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미얀마의 모습은 어떤가. 군부의 잔혹한 학살과 만행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있으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불씨를 키워나가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이, 국민들에 의한, 국민들의 민주화를 쟁취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그 끝은 결국, 만개한 민주화의 꽃일 것이다. (이정애, ‘미얀마의 개혁·개방 정책과 북한에 대한 함의’ 참고)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