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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窓(창)] “새로운 검열관의 출몰”

 

스페인의 코르도바(Cordoba)와 톨레도(Toledo)는 고색창연한 도시다. 중세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이미 고전(古典)인데, 파리대학이 유럽 중세의 지적 탁월함을 이루기 전에는 바로 이 두 도시가 쌓아올린 학문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랍어로 쓰여진 그리스 철학과 과학은 훗날 르네상스의 젖줄이 된다. 12~13세기 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새삼 발견하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걸까? 8세기 이후 15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의 영역이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접한 지중해를 거쳐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은 한때 로마제국의 판도였으나 제국의 몰락으로 이슬람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도권은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기독교, 유대교를 핍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면서 배워나가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 코르도바와 톨레도의 잔해

 

 

하지만 이슬람을 축출한 15세기 스페인은 잔혹한 국가로 변모했다. 종교재판은 세비야를 중심으로 광기처럼 번져나갔는데 이 징벌로 적지 않은 이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산채로 불태워져 죽어갔다. 사상과 신념은 통제되었고 공존의 윤리는 무너졌으며 종교재판은 “무서운 검열관”의 등장을 의미했다. 코르도바와 톨레도의 유산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잔해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적 성장은 그렇게 저지당했다.

 

“칸트가 평생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것은 무엇일까?” 라는 문제가 나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그건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이었다. 이성의 비판정신을 강조한 그의 철학을 프로이센 정부가 달가와할 리 없었고, 이에 대해 칸트는 “검열은 공익을 논의하기 위한 시민의 권리를 핍박하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그는 나이 칠십에 이르렀을 때 검열로 출간이 금지당한 원고를 모아 책을 내는 용기를 발휘한다.

 

칸트는 외적인 정치적 권위가 한 인간의 내적 자유를 금지시킬 권리가 없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그가 남긴 저 유명한 경구 “sapere aude!"는 라틴어로 ”두려움없이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라!“라는 뜻이다. 그건 검열이 가한 상처와 충격을 삭히면서 대철학자가 뚫어나간 “정신의 자유로(自由路)“에 꽂힌 깃발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등장은 1970년대 미국에서 차별적 언어/정책의 통용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운동으로 출발했다. 누군가 또는 특정집단을 “배제(exclusive)”함으로써 그 발언권을 묵살해버리거나 모욕과 불이익을 가하는 상황을 막고 “포괄적(inclusive)” 차원을 열자는 노력이다. 흑인을 지칭하는 인종주의적 용어인 니그로(Negro)가 블랙(Black)으로 변하고 이조차도 살색차별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후 아프리칸-어메리칸(African-American)으로 바뀌어나간 경우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블랙 파워” 또는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가 여전히 쓰이고 있기도 하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교조적 언어통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고 역사적 의미가 획득되는 경우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 이런 맥락을 모두 무시하고 무차별적 방식으로 언어교정에 나서는 순간, “정치적 올바름”은 새로운 검열관이 되어버리고 만다.

 

- 정치적 올바름이 검열관 노릇을 한다면...

 

가령 조선인(朝鮮人)은 조선사람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용어인데 일본인들이 경멸하듯 조센징이라고 하면 민족차별적으로 들리고 재일조선인을 재일한국인이라고 부르면 분단체제의 맥락을 제거한 용법이 된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언어의 차별성을 시정하는 방식은 따라서 언어를 빈곤하게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그 풍부한 뜻을 다채롭게 새기고 이해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검열행위가 되지 않는다.

 

최근, 논지의 핵심은 의도적으로 제끼고 용어 하나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상황이 벌어졌다. 차별용어를 극복하자면서 포괄적 방식이 아니라 배제적 독선을 보인 경우였다. 그건 단연코 검열행위다. 이걸 받아쓴 언론들 역시도 검열권력을 휘둘렀다. 우리의 사유가 가질 시민으로서의 공적 권리를 침해한 사건이었다. 논의의 공간을 용납하지 않고 일방적 규정을 밀어붙이려는 비이성적 오만은 종교재판의 야만을 닮았다.

 

지적 폐허를 자초하는 행위다. 역시 “sapere aud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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