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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짧은 생, 긴 여운

 

 

 

가난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책 읽고 글 쓰며 보람 있는 탑을 쌓고자 했다. 수필은 진실을 바탕으로 자기 철학을 실현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문학 속의 문장이다. 삶의 선용(善用)을 추구하는 길이다. 더불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선생님 그림자는 밟아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마음은 조금 무거워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선생님을 만나고자 가는 길은 항시 그랬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멀리 사는 시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다른 분과 함께 고하(古河) 선생님을 찾아가 뵙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며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진정성이 있어 응하기로 하고 오늘 집을 나섰다.

 

근래에 선생님이 낸 시집을 신문 신간 소개에서 읽었던 터라 서점으로 가 시집을 사가지고 선생님이 계시는 고하문학관으로 갔다. 뒤에 온 C 시인은 ‘선생님께서 요즘 시집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한 권 얻고자 했다. 선생님은 출판사에서 몇 권 주었는데 다 나가고 우편으로 보낸 책이 되돌아온 게 몇 권 있다고 하시며 난감한 표정이었다. 순간 서둘러 식사하러 가시자고 하여 모시고 차를 타고 가는데 한 생각이 떠올랐다.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어느 날 안00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요즘 시집을 냈다면서 왜 책을 안 보내느냐?” 고 따지듯 말하더라는 것이다. 안 시인의 대답이 걸작이다. 너는 너희 회사에서 새로운 차가 나오면 친구들에게 한 대씩 무료로 보내주느냐? 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문단 주소록에서 주소를 보고 수신자 이름도 생략한 채 보내오는 책들이 짐스럽게 느껴지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 어깨 위 책들도 다 못 읽어 숙제를 미루고 있는 학생의 심적 부담이다. 그런데 일주일에 네댓 권씩 올 때도 있는 이 책들을 어느 시간에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나는 선생님에게 영혼의 힘으로 기억하고픈 말씀을 눈으로 얻어들었다. 책을 받게 되면 엽서라도 사서 받았다는 소식과 작가의 수고를 위로하는 뜻을 적어 보내야 하는 문인으로서의 예의를. 그래서 내가 구상하고 도안한 엽서를 별도로 제작하여 책을 보내온 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편지글로 써 지금껏 발송하고 있다. 또 하나, 선생님은 외국의 예를 들어가며 새로 나온 책은 서점으로 가서 책을 구해 작가에게 가지고 가 사인을 받는 게 옳은 일이라고. 그런데 지금 세상에 이렇듯 꼼꼼히 생각하고 남이 안 하는 일을 하다 보면 꽉 막힌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식당에서는 선생님 맞은편에 앉았다. 서점에서 사 온 선생님의 시집을 보여드리고 만년필과 함께 드리며 사인을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언제 샀느냐고 하시며 서점에 몇 권이나 더 남아 있는지를 궁금해 하시며 사인을 하셨다. ‘김경희 작가 님께 / 2021. 5. 12. / 고하 드림’이라고 써 주셨다. 그 순간 ‘짧은 생, 긴 여운’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이 어린 내게 ‘님께’라고 쓰지 마시라고 해도 여전하신 선생님이다. 옆의 시인들은 숨죽여 보고 있었다. 선생님 글씨체는 지펜 글씨같이 네모반듯하다. 그 글씨는 말해주고 있다. 선생님의 선비 의식과 시조 시인으로서의 풍류정신과 자적(自適)정신을 그리고 수필의 대상에 대한 감성적 표현과 예술적 향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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