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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역사의 생소한 얼굴, 새로운 각성

⑳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김미례

가장 폭력적인 것이 가장 순수한 것이다. 불온한 상상력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의 기제(機制)가 된다. 김미례 감독의 숨겨진 노작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자명(自明)한 척 도리어 모든 진실이 묻혀져 가는 시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작품이다.

 

특히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한국인 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 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 현실에서 사람들의 손에, 또 그들의 머리에 무엇이 실리고, 무엇이 담겨져야 하는 가를 지목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라기보다는 고요한 포효(咆哮)이다. 거친 진술의 기록이다. 깊이 파묻혀 있던 한 시대의 분노를 발굴하는 고고학이다. 그리고 그 유물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직시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이다.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4년과 75년 일본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과격 테러리스트들의 얘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선’은 이른바 정치조직이나 군사조직이 아니다. 이념이다. 이념적으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오염됐던 반정부 조직, 적군파와 달리 순수 ‘도시 게릴라’를 자처한 테러’범’들의 ‘생각=선언=주의=연대’를 지칭한다.

 

이들은 늑대 부대, 대지의 엄니 부대, 전갈 부대라는 소조(小組)의 이름으로 미쯔비시 중공업 본사에 폭탄을 설치했다. 일본 군국주의에 편승해 성장한 전범 기업이라는 이유였다. 순국칠사지비(殉國七士之碑) 같은 것도 폭파시켰다. A급 전범 사형수 7인의 추모비였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다. 다수가 다쳤다. 일본 사회가 요동쳤다.

 

1972년 적군파가 일으킨 아사마 산장 인질사건으로 일본 대중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정치투쟁에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일본 정부는 전쟁의 책임에서 확실하게 벗어날 명분을 찾고 있던 터이기도 했다. 우민화의 확실한 도구가 필요했다. 일본 우익과 군경, 언론들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새로운 과격 이데올로기의 산실로 지목하고 대대적인 색출 작업에 나선다. 1975년 부대원들은 거의 모두가 체포된다.

 

영화는 이들 중 핵심 멤버인 에키타 유키코와 아라이 마리코, 다이도지 마사시 등의 이후 행적을 좇는다. 대지의 엄니 부대원이었던 에키타 유키코는 1977년부터 40년을 복역 후 2017년 출소한다. 아라이 마키코는 늑대 부대원 동조자라는 이유로 12년을 살았다. 현재는 반원전, 반핵(反核)활동가로 살아간다.

 

 

역시 늑대 부대원이었던 다이도지 마사시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마사시는 투옥 생활 중 하이쿠를 썼다. 이들 중 에리타 유키코의 삶이 가장 극적인데 1975년 1차로 체포됐지만 아랍에서 비행기를 납치, 인질극을 벌이며 ‘포로교환’을 조건으로 내세운 적군파의 요구에 따라 석방돼 이들에게 합류한다. 하지만 곧 국제경찰에 의해 다시 체포돼 일본으로 압송된다.

 

다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내용이 갖는 휘발성에 비해 매우 서정적이다. 잠잠(潛潛)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더 매력적이고 위험하며, 불온하게 느껴진다. 늑대와 대지의 엄니, 그리고 전갈의 부대원들은 과연 옳았는가. 그들의 폭력 노선은 정당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무수한 동아시아 사람들을 학살하고 탄압한 일본 군국주의 정권에 대해서는 누군가 올바르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현실과 미래를 계속 과거의 어둠으로 끌고 가는 짓이다. 게다가 그들은 패전을 패전이라 인정하지 않고 종전(終戰)이라는 교묘한 선전선동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지금까지 연장해 오고 있는 상태이다.

 

 

김미례의 다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주장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에 서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던 폭력의 실체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범죄가 올바르게 처벌받았는지를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목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본 군국주의가 유포한 대동아공영권의 허상과 그 폭압성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던 문구이기도 했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일본 내에 이런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울 것이다. 역사의 생소한 얼굴은 종종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70년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어쩌면 지금 시대, 지금의 우리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이 땅에서 벌어졌던 친일부역의 문제, 수많은 역사 청산의 난제를 어떠한 시각에서 정리해야 하는 가를 새삼 고민하게 만든다. 폭력은 절대 불가하지만 역사적 처벌과 응징은 매우 엄정해야 한다는 것, 가혹할 만큼 철저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무장하게 만든다. 이 74분짜리의 ‘위험한’ 다큐가 던져 주는 교훈이다.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 미국의 웨더언더그라운드,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까지 1970년대 혼란의 시대에 대한 기억과 인식을 소환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왜 혁명은 변질되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신봉하고 의지해야 할 이데아는 과연 무엇인가.

 

다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같은 희대의 작품이 대중들의 시선에서 철저하게 비껴서 있는 것도 모두 지금과 같은 혼절스러울 정도의 시절 탓이다. 강제징용자 피해보상 재판의 1심 판결부 같은 우매하고 뻔뻔한 인성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숨은 보석과 같은 이 영화를 찾아 보시기들 바란다. 보다 명징한 시대적 지향점을 지닌 영화를, 발품을 찾아가면서 보는 일이야말로 작은 혁명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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