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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선물 같은 책

 

 

약속한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해 시내버스에 올랐다. 운전사 뒷좌석에 앉았다. 버스가 모래내 시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지막 손님으로 30대 중반 나이의 여인이 올라왔다. 그녀가 신용카드를 체크하는 기계에 대니 ‘잔액이 부족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다시 다른 카드를 꺼내 기계에 댔다. 기계는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고 나무라듯 말했다. 당황한 여인의 얼굴에는 놀라움의 그늘이 짙게 깔렸다. 그녀는 기사에게 조금 있다 계산하겠다고 말하고 나의 뒷좌석으로 가 앉았다.

 

그냥 보기엔 여유 있는 가정의 부인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당히 생활하며 지내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다시 기계 곁으로 가서 카드를 댔다. 또 실패였다. ‘내 카드를 줄까. 안 받는다면!’ 잠시 망설이다 선뜻 카드를 내밀었다. 눈으로는 꼭 받으라는 사인을 보내면서. 그녀는 내 카드를 받아 기계에 댔다. 기계는 또 ‘조금 전 사용한 카드입니다.’라고 딴소리를 했다. 기사가 재빨리 어딘가를 손대니 그때서야 받아들였다. 여인은 한숨을 쉬더니 내게 카드를 돌려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뒷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약속한 사람을 만나 추어탕을 먹기로 했다. 식대는 내가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별말 없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만나고 있는 상대를 잘 알고 있는 주민복지관 여직원이 우리 몫까지 지불했다고 한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가 계산하기로 한 것’이라고 여직원에게 말했다. 그녀는 한 번 씩 웃고 돌아서 갔다. 오늘 밥값을 더듬어 짐작해 보았다. 아전인수 같은 시나리오일지 모르나 내가 버스 안에서 내밀었던 카드 덕분에 돌아오는 선물인가 싶었다.

 

밥값도 살아 있어 서점으로 갔다. 서점에는 주문했던 『제인 구달』과 『동물 인문학』 책이 와 있었다. 나는 두 권의 책값을 즐거운 마음으로 계산하고, 신간 판매대 앞으로 갔다. 이어서 자연환경에 따른 서적들이 꽂혀 있는 곳으로 가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베스트셀러 진열장 앞에서는 책의 얼굴인 표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나로서는 이 순간이 소박한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나만의 시간이 된다. 마음 풍요롭다. 책 제목에서 내용을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다. 작가의 연령과 직업을 유추해보게도 된다. 책의 디자인과 출판사는 물론이요. 날개의 저자 소개도 살펴본 뒤 서문을 읽는다. 차례를 훑어보는 것은 상식이요 저자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발문이 있다면 대강 몇 문장이라도 읽는다. 이유는 내가 책을 펴낼 때의 제목과 디자인 그리고 지금 출판계의 흐름과 독자의 선호도 및 문화계의 풍향을 읽어 참고하고 싶어서다.

 

글 쓰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오면서 껄끄러운 식사는 사양해왔다. 농가 태생으로 도시로 옮겨와 살아오면서 직장은 가족들 생계를 책임져주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럼으로써 직장에서의 밥그릇 같은 내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선반 위에 얹혀놓기도 했다. 지금은 자유이다. 독서하고 저술하면서 내 머리가 바깥 기후에 시달리지 않게 마음 쓰며 오직 내가 주인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껄끄러운 밥 입 안에 밀어 넣을 일 없다. 소중한 분과 예의 갖춰 감사하는 마음으로의 식사 시간이기를 희망하며 살고 있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귀가하는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아 선물 같은 책의 책장을 넘겨본다. 행복한 순간으로의 진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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