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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칼럼]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발언

 

1.

“이 자들은 너무 적게 일하고 너무 많이 받으려 한다.”

 

산업혁명이 개시된 18세기 중반부터 250여 년 동안 고용주들이 유행가처럼 흥얼거리던 말이다. 뼈가 부서지는 초과 노동 아래 신음해온 노동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말을.

 

특히 1830년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노동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조차도 영국 노동자 1일 평균 노동시간은 12시간에서 최대 16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하루도 안 쉰다고 가정하면 112시간, 일요일 하루는 쉬는 것으로 계산해도 96시간이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수용자 사망 확률이 85%였던, ‘강제노동을 통한 절멸을 목표로 했던’ 아우슈비츠에서조차 주당 최대 노동시간이 98시간이었다. 나치가 인간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한계 이상의 노동이 강제되면 몸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전 세계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문제가 말 그대로 죽고 사는 생존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2.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정부의 주 52시간 노동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중간에 “주당 120시간 근무” 운운을 들이밀었다. (스타트업 청년의 말이라 빗대면서)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 고 밝힌 것이다.

 

명실 공히 세계기구를 통해 선진국 그룹에 속한다고 인정받은 대한민국이다. 그러한 오늘, 유력 대선후보의 입에서 이런 발언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2000년 이후 현재까지 프랑스의 법적 노동시간은 주당 35시간이다. EU 가입 전체 국가로 범위를 넓히면 주당 평균 38.6시간. 스웨덴의 경우도 주당 40시간 노동을 30시간으로 줄이려는 합의가 오래전부터 시도되고 있다.

 

WHO와 국제노동기구(ILO)는 주당 55시간 이상을 장시간 노동으로 규정한다. 2021년 5월 기준으로 이에 해당되는 케이스로 세계에서 연간 74만 5000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을 위해서도 노동시간 단축은 손해가 아니다. 긴 노동시간이 생산성 증가와 상관관계가 크게 없다는 수많은 연구가 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충분한 휴식과 여유가 노동생산성과 건강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워라밸(노동과 일상의 균형)” 열풍이 공연히 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3.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마치 제가 120시간씩 일하라고 했다는 식으로 왜곡한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반발했다.

 

설사 그의 발언이 주 120시간 노동제 허용이 아니라 단지 노동시간 유연성을 확대하자는 주장이었다 치자. 그렇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즉 사용자에게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 형태를 극단적, 임의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언(傳言)이라 해도 이 정도의 폭발적 이슈를 입에 담는 자체가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이 사람은 전혀 이해 못한 것 같다. 만에 하나 동의는 하지 않는데 남의 말을 그냥 전달했다면 어떻게 되나. 그건 스스로가 앵무새라는 걸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는 깨달아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애초에 ‘주당 120시간 노동 운운’ 자체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곧 참혹한 (비자발적) 강제 노동을 대한민국에 끌어들이자는 소름 끼치는 초대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일주일의 짧은 기간이든 아니면 더 긴 기간이든 사람이 이 같은 초 가혹 노동조건에 처하면 진짜로 죽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나는 예전에 일하던 광고업계에서 며칠을 꼬박 새우며 일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건장한 30대 후배를 실제로 봤다).

 

시정잡배가 이런 소리를 지껄이면 그저 웃고 지나가면 그만이겠다. 하지만 윤석열 씨는 대선을 8달 앞둔 현재 야권의 압도적 지지율 1위 후보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은 접어두시라.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부디 정신을 가다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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