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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⑱ 경기도 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

종교를 통한 교육구국운동, 사회결사운동 등 중심
일제와 싸우면서 민족진영의 정신 세계 지키고자 노력
목숨 걸고 신사참배 거부한 가평 적목리 신앙공동체

 

합방의 비운을 맞은 순간이나 일제강점기 전시기를 통해 사람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삼았고, 또 결속함으로써 사회 결사의 조직적인 힘을 조성했다. 특히 한민족의 종교적 지형은 지배 종교가 없는 시대였다. 

 

여러 갈래의 종교가 신종교적 성격을 띠었는데, 민중들의 호응이 가장 컸던 종교는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심장부를 둘러싸고 있던 경기도 역시 다양한 종교들이 민족문화운동 창출에 매진했다.

 

 

경기도는 다른 지역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는 종교적 민족문화를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초기 의병운동이 진압되면서 일제강점 초기 경기도 일대에서는 종교를 통한 교육구국운동, 사회결사운동 등이 중심을 이뤘다. 도시, 농촌 모든 곳에서 일어났고, 깊숙한 산야는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신흥종교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경기도 지역의 종교운동은 사회적 기능상 진보적이어야 했고, 실리적이며 실천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종교들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조선총독부라는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식민통치의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억압적 통치구조에 맞서 민중결사를 유도해낸 신종교는 천도교와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구세군 등의 개신교였으며, 천도교와 여러 종파의 개신교는 일제와 싸우면서 민족진영의 정신세계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이렇듯 경기도 일대의 종교운동은 일제강점기 전 기간 동안 조직적인 교단운동과 사회개혁적인 신앙운동으로 꾸준히 지속됐다. 다만, 제도화된 교단종교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회유 때문이었다.

 

한강변에 위치한 양평은 조선시대 천주교 신앙이 싹튼 곳으로, 그 주변의 남양주와 광주 남한산성 천진암 등은 서울에서 정치권력에 실각한 양반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가치체계 운동으로 서학과 천주교운동을 일으켰다.

 

동학이 창도 당시 기층 농민을 대상으로 종교운동을 전개했다면, 천도교는 농촌지역의 농민과 함께 도시의 중소상인, 학생, 개화지식인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갑진개혁 이후 천도교의 중심부는 경성이 됐다. 또한 천도교 운동은 점진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조선총독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도교는 북한산 밑 수유리에 봉황각과 강학당을 건축하고 팔도의 인재들을 모아 민족운동 세력으로 양성했다. 이에 일제의 회유와 탄압이 계속됐지만 이들은 굴복하지 않았고, 경성과 경기도 주변에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종교세력이 됐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조직적인 선교를 담당한 세력은 개신교 중 감리교였으며, 이들은 복음선교보다 병원과 학교, 출판사를 세우는 문화선교를 우선으로 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해서도 일제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통감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과 1915년의 개정 사립학교령을 발표, 기독교 학교의 교육활동을 위축시켰다. 소위 황국신민교육을 장악하는데 방해가 된 것이 미션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지역의 종교세력이 적극적인 저항 형태를 집단적으로 표출한 사례는 소수다. 그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가평 적목리에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식민통치에 직접적인 반대를 표명한 안식교의 적목리 공동체 신앙운동은 무저항 불복종 민족운동으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가평 적목리 신앙공동체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일정 말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대한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꽃다운 처녀들은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던 시기, 일제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강제징용과 징병 그리고 교회 명령을 목숨을 걸고 거부한 7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가평군 적목리 신앙공동체이다.

 

이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심산계곡 통나무집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일제의 살인마적 폭력 앞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애국정신을 지켰다. 지도자들은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백성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적목리 신앙공동체 형성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전운이 짙어짐에 따른 선교사들의 철수와 한국인 지도자들의 검거 및 순교, 그리고 교회해산 등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적목리는 가평역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길, 들어가는데만 하루가 걸리는 만첩산중이었고, 일단 들어오면 하룻밤을 묵어 가야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 곳으로 모이게 된 연유는 이미 18년 동안 목상으로 산판 경험이 많은 신태식 목사가 당시 가평의 경춘철도 임업주식회사 출장소 소속이어서 산중에서 철도 침목(枕木)을 깎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당시의 화급한 일화를 신 목사의 아들인 신우균 목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이름난 애국지사는 아니었으나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나머지 일본은 곧 망하고 미국이 이길 것이며 그때에는 신앙의 자유가 올 것이란 신념이 있던 분이시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일본 순사 두 명과 한인 순사 한 명이 우리 외딴 집으로 연락도 받기 전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일본 순사들이 칠판에 한글이 적혀 있는 것(성경 절들)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략) 준비가 끝나자 아침 일찍 조용히 집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중략) 며칠을 걸었는지 모른다. 발이 부르트고 터져서 쓰리고, 그래도 걸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도착한 곳이 적목리였다.”

 

 

적목리 신앙공동체의 주요 목적은 신앙 양심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민족정신을 지켰다. 이들은 무모한 일제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강제징집을 거부했는가 하면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70여 명이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식량이 큰 문제였다. 더구나 겨울에는 음식을 구할 수 없는 형편으로, 나물과 풀, 나무껍질 등을 벗겨 먹거나 나물을 쌀이나 옥수수 등으로 끓인 죽을 먹곤 했다. 가족들 중 일부가 산판에서 일하고 배급받은 소량의 식량으로는 모든 식구들이 먹기에 언제나 부족했다.

 

“평강에서 얻은 아들 상순이가 난 지 1년도 못되어 올라온 터라, 아내는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더욱이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형편에서 젖이 나올 리 없었다. 산에 들어갈 때 가지고 온 약간의 쌀로 밥을 지어 산모와 갓난아이에게 먹이노라면 다섯 살 짜리 효순이가 콩깻묵을 씹다가 숟가락을 놓으면서 ‘다 큰 아이는 밥 먹는 거 아니지?’ 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아서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은 메어지는 듯했다.” 

 

 

신태식 목사와 함께 공동체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반내현 목사가 남긴 기록이다. 반 목사는 가족들을 공동체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주로 일경을 피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백성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극도의 곤궁한 생활에서도 머지 않아 해방될 조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반내현을 위시한 지도자들은 사선을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전국을 순회, 신앙정신을 교육하고 계몽운동을 펼친 것이다. 특히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고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쳤다. 그렇게 이들은 1943년 9월 해방이 될 때까지 2년 간 적목리라는 심산유곡에서 일경을 피해 겨우 연명하며 신앙의 자유와 민족혼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이종근 삼육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는 “이 공동체는 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오늘날 우리들에게 인간존재의 한계상황에서도 개인들이 믿음으로 뜻을 모으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귀감이 된다”며, “암울했던 시대, 신앙양심에 입각해 민족정기를 지킨 항일 민족정신의 훈련장으로서 교육적 의미가 크다”고 평했다. 

 

* 자료 및 사진 출처=일제하 경기도 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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