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하지 않은 청년이었다. 일상처럼 불안정한 성장기와 무엇 하나 수월하지 않은 위태로운 날들을 거치며 선택보다 포기를, 패기보다 허무를 배웠다.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살아가는 게 행복하지 않은데 치열한 삶을 강요하는 사회가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살아내기가 죽기보다 고통스러웠던 90년대.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PC통신 채팅이 유행했다. 얼굴도 모른 채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세상이 신기했다.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낮은 나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사이버 공간에 갇혔다.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현실의 고통을 피하고자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누군가 지나가며 이 말을 툭 던졌다.
"가짜를 추구하지 마"
살다보면 그렇게 다가오는 말들이 있다. 무심한 언어는 가슴에 내리꽂혀 의식을 흔들어 인식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심장에 비문(祕文)처럼 새겨진다. 통찰과 자각으로 연결되어 사물과 세상의 본질을 꿰뚫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가짜를 추구하지 말라는 충고는 예리하고 정확하게 가슴에 박혀 시퍼런 칼날처럼 번득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준거가 되었다.
진짜는 무엇인가. 나는 진짜인가, 내 삶은 진짜인가. 물음은 물음으로 이어졌다. 모르는 교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늙은 환경미화원에게는 뻣뻣하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나, 권력자의 지시와 명령에는 복종하면서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나, 내 가족에게는 기꺼이 지갑을 열면서 추위에 떠는 웅크린 노숙자는 외면하는 나를 만났다. 강한 이에게 약하고 약한 이에게 강한, 약하면 짓밟는, 친구의 모습을 한 진짜 무서운 적들도 만났다.
착함이 나약함과 무능함의 코드로 읽히고 무골호인(無骨好人)이 호구라 놀림 받는 세상에서 인간성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사람과 그 삶을 비웃는 사회가 보였다. 호기심과 질문은 사라지고 코딩과 프레임만 남은, 내러티브는 생략된 채 프레임에 갇혀버린.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속단과 속절로 판단하는 사회를 만났다. 존재를 진심으로 마주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회는 가짜가 난무하고 가짜가 진짜를 조롱하며 모멸하고 있었다.
진보와 보수,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청년과 노인, 재벌과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호남과 영남, 서울과 지방, 강남과 강북, 명품과 가품, 아파트와 저층주택, 사교육과 공교육, 이성애자와 성소수자 등 수많은 경계와 차별, 격차로 분단된 세상이 보였다. “진짜와 가짜”의 잣대를 들이대어 바라본 세상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진짜의 모습을 한 가짜, 거짓을 참으로 꾸미는 가짜가 득세하는 사회가 아찔했다. 가짜를 감별해 걸러내고,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을 무효로 만들고, 자신과 타자를 나누는 경계가 모호해질 때, 세상은 누구의 것도 아닌 모든 사람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