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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오늘의 성찰'] 죽음과 삶

 

죽음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데도, 우리는 마치 죽음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인간의 생명이 과연 죽음과 동시에 끝나는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불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위는 이성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가, 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만약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속의 무엇이 불멸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속에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 멸하는 것보다 멸하지 않는 것에 대해 더 많이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그것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스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의 온갖 고통이 선을 낳지 않는다면,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사악한 기제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은 말할 수 없이 부도덕한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괴롭힘을 당하며, 모든 행복의 잔에 일부러 쓰디쓴 약을 타고, 평생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 인생을 마치게 되기 때문이다. 신과 영생이 없다면, 사람들이 삶에 대해 나타내는 혐오의 감정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혐오의 감정은, 현존하는 질서보다 오히려 무질서에 의해, 즉 무서운 도덕적 혼란에 의해 유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위에 신이 있고, 우리 앞에 영원불멸이 있다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우리는 악 속에서 선을 보고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희망이 절망을 몰아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죽어서 저세상으로 가는 광경을 상상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신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죽음 또한 선(善)임을 믿는 것뿐이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진리를 밝히는 ‘현존(現存)’이다. 성서의 한 구절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표현보다 더 급진적으로, 하이데거는 진리와 자유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자유가 너희를 진리되게 하리라.”

 

아파하는 영혼, 영혼이 담에는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고 하니, 이놈, 이 눈이란 놈은 자기 뜻대로 못 하니까, 자기가 다 우연히 하기는 하지만 아파하는 일만은 잘 못해요. 그러니까 그 고통으로 인해서 이것이 살아가게 돼. 그리고 먼저 좋은 것은, 나는 좋다 쾌감을 얻지마는 불쾌감을 얻는 이는 내 영혼 혹은 내 양심, 그 불쾌감을 밤낮 이십사 시간 갖는 양심으로 인해서 내가 살아난다 그 말이야.


이거 어렵게 생각맙시다. 예수님이 돌아가신고로, 그런 말 말고, 우리 몸에 단축되었던 그 원리를 전체에 적용해서 사신 이가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그가 우리 죄를 대속했다, 그러는 거예요. (함석헌)/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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