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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페티카, 최 표트르, 최재형

 

 

 

겨울의 끝자락이다. 마지막 추위가 매섭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페티카, 그는 함경도에서 태어난 노비의 아들이었다. 아홉 살 나던 해 가족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러시아 초등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고려인이었다.

 

온 가족이 나무를 캐내고 돌을 주워내며 밭을 일구었지만, 세끼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그가 가출한 것은 열한 살 때였다.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던 그는 무작정 연해주 최남단의 항구도시 포시에트로 갔다. 하지만 어린 그를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굶주린 채 지쳐 쓰러진 그를 구해준 사람은 러시아인 선장 표트르 세묘뇨비치였다.

 

페티카는 표트르 세묘뇨비치 선장을 따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흐름과 물정을 익혔다. 표트르 세묘뇨비치의 부인은 배에서 내린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주었다. 러시아 정교회에 입교한 그는 표트르 세묘뇨비치 부부의 양자가 되어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러시아에 귀화한 그의 정식 이름은 초이 표트르 세묘뇨비치였다.

 

19세기 말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인 중에 최초로, 유일하게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사업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그는 여러 개의 훈장도 받았다. 러시아 황실과 정부, 군대의 그에 대한 신망은 두터웠다.

 

페티카는 크라스키노의 행정책임자인 도헌으로 임명받았다. 조선인 최초의 행정단위 책임자였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함께 거머쥔 그였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했던 그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대단한 것은 그가 혼자 성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페티카는 연해주로 이주한 농민들에게 돼지와 닭을 기르게 해 러시아 군대에 납품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해안에 정착한 어민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군납할 길을 터주었다. 그의 덕분에 조선에서 건너온 농민과 어민들은 두세 배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고려인을 위해 연해주에 수십 개의 학교를 세웠고, 도헌으로 받은 연봉을 모두 적립해 총명한 조선인 아이들을 해마다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시켰다.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그를 페티카로 부르며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집집마다 그의 초상화를 걸었다.

 

페티카는 러시아 벽난로, 우리가 페치카로 부르는 바로 그 난방기다. 벽에 내장된 페티카는 한 면의 벽돌을 데워 그 복사열로 온 집안을 데우는 러시아식 난방기였다. 연해주의 조선인 중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그의 온기를 쬐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러시아에서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 그였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모두 누리며 편히 살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3·1운동 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을 대표로 추대했다. 상해 임시정부보다 한 달 먼저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였다. 안중근과 홍범도의 무장투쟁을 지원한 것도 그였다.

 

일본의 표적이 된 것은 당연했다. 1920년 4월 ‘연해주 참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페티카가 살던 우수리스크를 급습했다. 페티카는 피신하라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망가면 너희가 모두 끌려가 고문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죽어도 그만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60이었다.

 

페티카, 그는 기댈 곳 없는 고려인의 난로가 되어 그토록 뜨겁게 살았으며, 가족과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으며 누구도 거두지 못한 성공을 거두었던 ‘최초’의 사람 페티카, 그는 성공한 러시아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였으며 조선 노비의 아들 최재형이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을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해보라. 그들이 바로 고려인의 아버지로 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최재형의 후예들이다. 우리는 누구의 피와 눈물로 되찾은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외국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길거리에 쓰러진 가난한 이주민 소년을 자식으로 받아주었던 표트르 세묘뇨비치 부부의 마음을 한 번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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