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목소리 역: 하라 나노카)는 규슈 구마모토 현에 살고 있는 소녀다. 16살이며 엄마는 4살 때 실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공무원인 이모 타마키(목소리 역: 후카츠 에리)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이모는 죽은 언니 대신 스즈메를 키우느라 청춘을 보냈다. 남자를 집에 초대하지도 못했고, 마음 편하게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했다. 스즈메는 스즈메대로 그런 이모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구석도 있다.
스즈메는 아직도 엄마가 어딘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꿈을 자주 꾼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는데 책상 의자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고가 있던 ‘그날’, 의자 다리 하나가 빠졌었다. 스즈메는 그 ‘불량’ 의자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채 살아 간다. 엄마가 남기고 간 것이니까.
스즈메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모가 차려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냅다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고개 아래 길 맞은 편으로 한 잘생긴 청년(나중에 알고 보니 교원을 준비 중인 대학생), 소타(목소리 역: 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난다.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 근처에 폐허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때부터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아니 소타를 ‘갖고’ 다니며 폐허 속 문을 찾아 문단속에 나서게 된다. 소타가 고양이 묘석 다이진의 저주에 걸려 스즈메의 다리 세 개짜리 의자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타에 따르면, 폐허 속 문을 닫지 않으면 대지진이 일어난다. 그의 설명으로는 일본 전역 동서 양쪽에 두 개의 묘석이 박혀 있고 이 묘석이 ‘미미즈’를 가둬 놓고 있는데 미미즈는 대규모 재난을 일으키는 엄청난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소타는 대대로 토지시(閉じ師, 닫는 자) 집안의 사람이다. 소타는 병석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히츠지로’ 대신 세상의 문단속을 하고 다니는 중이다.
애니메이션 판타지에 걸맞는 동화 같은 얘기지만 이 2D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와 작화, 연출을 모두 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 명료하다. 일본에서 더 이상의 재난은 없애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같은 것으로. 스즈메 같은 착한 소녀의 염원들을 모아서이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같은 소박하고 순수하며 어여쁜 소망이 담긴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착하고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데는 영화 속 스즈메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된다. 스즈메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출발해 시코쿠 지역의 에히메로 갔다가 혼슈의 고베 그리고 도쿄를 들러서 큰 문단속을 하고 결국엔 고향인 후쿠시마까지 긴 여정을 완성한다.
시코쿠의 에히메는 지난 2021년 기록적인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영화에서도 스즈메가 문을 닫는 과정에서 비바람이 치고 폭우가 내린다. 스즈메는 폐허 속 버려진 한 학교의 교실 현관 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에히메 산사태 때 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고베는 아예 ‘고베 대지진’이라는 말을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다. 1995년 규모 7.3의 대지진이 일어났고, 7000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며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 대재해였다. 영화에서 스즈메는 의자로 변한 소타와 함께 간신히 이 지진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한 유원지에 버려져 있는 대관람차 문 하나가 막 열릴 참이었다. 당시 고베에서는 평소처럼 유원지에 놀러갔던 가족 단위의 참사가 컸다.
자, 그리고 스즈메의 마지막 행선지는 도쿄와 후쿠시마이다. 도쿄는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때 무려 40만 명이 죽었다. 이 간토 대지진은, 직후에 벌어진 세계 대공황과 겹쳐 일본 사회를 극우 파시스트의 사회로 몰고 가게 한 직·간접적인 요인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는 도쿄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방화를 일삼는다느니 해서 집단 학살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즈메와 소타는 요석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미미즈는 나오지 못한다.
스즈메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4살 때 집을 떠났던 후쿠시마다. 12년 전, 그러니까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규모 9.1이었다. 이 대참사로 18만 명이 매몰됐다. 이어 후쿠시마 원전 사태까지 터졌다. 일본은 아직도 이 동일본 지진의 재난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황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래서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식 일본 대지진의 역사 기록서로 읽히기도 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상상대로 요석이 잘 박혀 있었어야 했다. 하나는 규슈에 또 하나는 도쿄에. 그때나 지금이나 스즈메와 같은 착한 소녀 그리고 소타 같은 불굴의 토지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즈메의 엄마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다며 방글대면서 엄마와 바이바이를 했던 아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이들을 무심코 보냈던 엄마들,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갔던 남자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 그 모두와 모든 것이 다 살아 있게 됐을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목놓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 그럼에도 그 폐허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무엇과도 같은 심정인 셈이다.
스즈메는 현재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후쿠시마로 향해, 집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서 폐허의 문을 열고 4살 때로 돌아 간다. 그리고 곧, 꿈 속에서 늘 엄마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엄마처럼 성장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스즈메는 비로소 엄마의 죽음을 직시하고 그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쳐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자신으로 성장한다.
스즈메가 커 나가듯 일본 사람들도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임으로써 그 죽음을 넘어서야 한다고 신카이 마코토는 이야기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그리고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재난 철학, 재난에 대한 사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전하는 작품이다.
재난은 재난을 당하는 과정에서는 분루(憤淚)의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늘 감동의 휴먼 드라마와 눈물 없이 듣고 볼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영화 엔딩에 나오는 밴드 래드윔프스의 노래 카나타하루카(カナタハルカ, KANATA HARUKA)는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사랑은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너’였어/ 몇천 년 후 인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얼굴로 웃는 너를 보고싶어/ 너와 보는 절망은 네가 없는 희망따위 흐릿하게 빛나게 할테니까
우리는 흔히 일본 사람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비판적이 되곤 한다. 우파인 자민당 70년 체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느냐고 지적들을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하루하루 살아낸다는 것, 대자연재해의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수 있겠다. 그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까.
신카이 마코토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스즈메처럼 남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며 사람들 간 연대이고,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올바른 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바로 너, 내 곁에 오늘도 숨쉬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 ‘너’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 전에 자신 곁의 단 한 사람부터 구할 일이다. 세상은 차곡차곡, 한 발 한 발, 매우 구체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토지시’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