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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이석영의 마지막 선택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우리의 지난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맞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당대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한때 나라를 빼앗겼다.

 

중요한 것은 빼앗긴 나라를 어떻게 되찾고 다시 세웠느냐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기울인 노력은 정녕 부끄러운 것이었을까. 아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었는가는 이석영 일가의 선택과 결단 하나만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1855년 이조판서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종숙 이유승의 양아들이 되었다. 서른 살에 과거에 급제해 고종을 보좌하는 승지로 관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라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났다. 고종이 중추원 의관에 임명했지만 그는 남양주로 낙향해 돌아가지 않았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간판마저 떼어내자 이석영의 6형제는 만주로 가 항일운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석영의 동생 이회영이 먼저 서간도로 가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이석영은 양주 일대의 만 석 재산과 토지를 모두 처분했다. 이석영이 양아버지 이유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조 단위에 해당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양주에서 서울까지 오면서 80리 길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석영의 나머지 5형제도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60여 명의 가족이 함께 만주로 떠났다. 그들 형제가 소유했던 토지는 여의도 면적의 세 배가 넘었다.

 

이석영과 그 형제들의 자산으로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했다. 이석영은 독립을 위한 일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으면서도 어떤 자리와 영예도 사양했다. 자기를 내세우는 일을 한사코 사양한 이석영이 지녔던 직함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10여 년에 걸쳐 배출한 3500여 명의 졸업생은 대한독립군의 근간으로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대한제국의 병력이 7000이었던 데 반해 1920년대 전후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군은 1만을 헤아렸다.

 

전재산을 아낌없이 독립군 양성에 바친 이석영은 76세에 몸져누웠다. 막냇동생 이호영이 그를 국내로 몰래 데려와 치료한 덕분에 기력을 회복한 이석영은 다시 동지들이 있는 중국으로 떠나려 했다. 건강을 염려한 동생이 여비를 마련해주지 않자 금강산 유람을 다녀올 여비를 달라고 해 기어이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비지로 겨우 연명하던 조선 최고의 부호 이석영은 여든 살에 상해의 빈민가에서 아사했다. 그들 6형제 중에서 살아서 조국으로 귀환한 이는 다섯째 이시영 하나였다.

 

세계 어느나라에서 당대 최고의 부호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아사의 길을 걸어간 애국자가 있었던가. 여섯 형제와 그 가족들이 기꺼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풍찬노숙하면서도 조금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며 끝까지 형제애를 발휘했다.

 

그런 위엄을 지닌 이들이 지켜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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