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보며 음악을 떠올릴 때가 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그림을 보면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Gymnopedies)가 흐른다.(느껴진다)
옛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짐노페디는 슬픈가락이나 어둡지 않고 단음 선율인데 불협화음이 느껴진다. ‘고독’만으로 말해질 수 없는 호퍼의 그림을 부연해준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 ‘브람스 4개의 소품 op.119 중 1번 인터메조 b단조’를 듣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람스와 호퍼의 저주받은 사랑. 스승의 아내를 평생 짝사랑한 브람스의 사랑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드물지만, 호퍼의 사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살았을 때도 슬펐던 사랑이 후세에 더 슬프다.
호퍼가 살던 시대의 미국은 어떤 곳이었나.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거대한 땅덩이, 천혜의 넘쳐나는 자원, 그리고 프론티어 정신으로 거세게 용틀임했다. 유럽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세계 1,2차 대전으로 망가지고 있을 때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미국은 공업국, 산업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호퍼는 1920년대의 대공황 혼란기에서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 그것도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 살며 도시화 과정의 편린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가슴을 친 것은 도시의 발전상이 아니라 그림자들이었다. 그의 그림을 나타내는 단어, 고독, 상실, 소외등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림의 상징으로 따라다녔다.
그의 그림은 ‘도시와 고독’ 두 단어로 설명된다.
지난 주, 뉴욕 휘트니 미술관과 공동 기획으로 전시 중인 서울 시립 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관람했다. 관람객들의 실망의 소리를 미리 듣고 왔다.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년작/Nighthawks)’이 빠졌다느니, 호퍼 자신이 흑역사라고 한, 호구지책으로 그렸던 삽화 전시가 다수라느니, 하는 투덜거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호퍼의 1914년작, ‘푸른 저녁(Soir Blue)’을 본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어둠이 내리는 파리 카페의 한 쪽 귀퉁이 풍경을 그린 것으로 손님 등 7명의 사람이 나오는데 가운데 앉아있는 흰 옷의 피에로가 눈에 확 들어온다. 호퍼, 자신을 그린 것이다. 압권이다. 화장은 이목구비와 표정을 지운 게 아니라 슬픔을 덮었다. 그래서 더 슬프다.
호퍼는 청춘시절, 파리에서 만난 한 여인을 10년 넘게 짝사랑했으나 버림 받았다. 그 후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보는 걸까. 중국영화 ‘패왕별희’에서 평생 시투를 사모했던 두지(장국영분)가 시투의 결혼 후 버림받고 지은 표정이 겹쳐지자 100년 전 그의 감정이 전이돼 심장을 누른다.
브람스는 (앞에 언급한) 음악을 1893년, 클라라 슈만에게 선물하며(그것도 자신의 생일에) 이렇게 말했다던가. ‘각 음표와 각 마디는 마치 리타르단도처럼, 각 음표에서 고독감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야 합니다’
브람스의 사랑을 모르면 '고독'이란 단어는 오독된다. 호퍼 그림을 장악하고 있는 '도시와 고독'도 마찬가지. '푸른 저녁'의 도시와 고독은 호퍼의 사랑을 알아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