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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백촌 강상호

 

100년 전, 일제 치하, 경상도 진주에 국채보상운동, 3.1 만세 운동, 학교설립, 백정 해방운동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젊고 의로운 인물이 있었다. 백촌 강상호(1887년생) 선생이다. 

 

국채보상운동 경남 책임을 맡았을 때, 스물 한 살이었다. 진주공립보통학교(진주초)의 학무위원이 된 건 스물 아홉. 그 무렵, 긴 가뭄과 대홍수가 지역사회를 초토화시켰다. 이웃들은 쌀독이 비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백촌은 양친과 함께 곳간을 열었다. 그리고 동네의 가가호호에 부과되는 호세ㅡ주민세와 유사한ㅡ10년치를 대신 냈다. 거금이었다. 서른 살이었다. 4-50대 중견인사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나 할 수 있는 일들을 그 나이에 농부들 벼 베듯 해낸 거다. 훗날 주민들이 백촌의 자당을 기려서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를 세웠다.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다'는 착하고 아름다운 합창이다.

 

"부족한 곳 누추한 마을
복전을 돌보아 농사짓게 해주시고,
천금을 바르게 쓰시어 
많은 집이 돈을 얻으니
그 혜택이 산과 바다와 같으매
은덕이 높고 넓음을 
돌에 새겨 잊지 않고
백세에 전하리라
1917년 
가좌리 주민 일동"
*복전(福田:복을 거두는 밭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 또는 그들의 밭을 가리킴)"

 

질풍노도의 10대 소년에게 스승은 이 훌륭한 부모였다. 그 덕에 상호는 조선팔도에서 보기드문 품격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을 이미 100년 전에 온몸 온맘으로 실천한 지행일치의 선각자가 된 것이다. 3.1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번질 때도 당연히 주도하였고 지독한 옥고를 치렀다. 석방되자마자 일신학교 설립과 동아일보 창간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신간회에도 핵심으로 관여했다.

 

그는 이 특별한 이력들의 연장선에서 일생일대의 혁명적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인권운동사의 굵은 획을 그었다. 이름하여, '형평사 운동'이다. '저울(衡)처럼 평등하고 공평한(平) 세상(社)'의 창립을 주도했다. 선생은 어느날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마을청년들이 백정의 아들에게 개를 잡으라고 시켰는데, 이를 완강하게 거부한 그 젊은이를 때려죽인 것이다. 백촌은 그 사건을 계기로 백정해방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겉으로는 모두 평등해졌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저 맞아죽은 청년이 증거 아닌가.

 

1923년 4월 25일. 형평사 창립일. 금년이 100주년이다.  해방후 이승만이 아니라, 품위있는 정치세력이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면, 세계 인권운동사에 길이 빛날 이 날은 국경일이 되었을 것이다. 백촌은 이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사 운동'에 가슴, 머리, 시간, 관계, 재산을 다 던졌다. 단기간에 40만 명의 백정들이 뭉쳤다.

 

이에 가족을 비롯하여 그간 다정하게 지내던 지인들 대부분이 백촌을 공격했다. 심지어 부친도 반대했다. 가까운 지인들조차 백촌에게 '新백정'이라며 대들었다.혁명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낯설고 두렵고 편치 않은 것이다. 역사는 그 저항을 뚫고 나가는 소수에 의하여 진보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0년만에 창업정신에서 너무나 흉하게 벗어났다. 일제가 혁명을 돈싸움으로 배후조정한 것이다. 그는 손을 뗐다. 

 

백촌의 재산은 마침내 작은 오두막집 하나뿐이었다. 그는 부총리였던 인촌 김성수에게 "산속에 들어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다"고 썼다.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둘이 만났을 때는 인촌도 시한부 생명이었다. 백촌이 세상 떴을 때(1957년 11월 12일. 71세), 미망인은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끼니꺼리도 남겨놓지 않고 먼저 죽으면 우리 새끼들하고 어떻게 살란 말입니꺼?", 원망하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 피울음이었다. 장남이 중학은 간신히 마쳤으나 고교진학은 형편이 안되어 포기하고 있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진주농고를 다닌 것은 실로 다행이었다. 구국영웅의 후손들은 왜 이렇게 예외 없이 남루한가. 법칙처럼...

 

백촌은 '진주에서 역대 가장 큰 장례식'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비석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훗날 익명의 독지가가 비석을 세워주었다. 논개사당과 함께 진주의 자부심인 형평탑은 시민사회가 모금하여 세워졌다. 가장 큰 후원자는 역시 '어른 김장하' 선생이셨다.

 

나는 과연 그 품격인생의 반의 반의 반이라도 살아낼 수 있을까. 그게 내 삶의 목표다. 아무쪼록, 형평운동의 21세기 버전ㅡ남녀ㆍ빈부ㆍ학력ㆍ지역ㆍ외국인 노동자ㆍ성소수자 차별 등의 극복을 위한 다양한 운동ㅡ이 100년 전 그 위대한 정신을 뿌리 삼아 역사에 남는 성과를 내기 바란다. 


그날이 진짜 해방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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