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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박사의 맛있는 인천 섬 이야기] ② 프롤로그

‘인천 앞바다, 근·현대 역사의 중심지’

  • 등록 2023.07.30 12:35:01
  • 14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인천 앞바다는 근·현대 역사의 중심지다. 풍도해전에 따른 청일전쟁, 제물포 해전과 러일전쟁,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지금도 NLL(북방한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간 긴장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풍도해전과 청일전쟁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농민군은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함락한다. 다급한 조선정부는 청국에 파병을 요청한다. 1894년 6월 청국은 청국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분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함선을 파병한다.

 

한편 일본 또한 한반도 지배를 위해 대본영을 설치하고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국은 일본 해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제원’, ‘광을’ 등 함선 두 척을 충남 아산에 파견했다.

 

하지만 일본은 청국이 병력 수송선을 아산지역으로 투입하는 계획을 미리알고, 일본 연합함대는 승봉도 근처 풍도 앞바다에 미리 잠복하고 있었다.

 

청국 함대 ‘제원’, ‘광을’은 그해 7월 23일 아산 앞바다에 도착하고, 병력수송선 ‘고승호’는 다음날 아산에 도착해 청군과 군마, 군량, 무기 등을 육지로 실어 날랐다.

 

7월 25일 ‘제원’, ‘광을’ 두 함대는 임무를 마치고 중국 여순으로 귀향하던 중 풍도 앞바다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 함대의 기습공격을 받게 된다.

 

일본군이 먼저 청국 함대를 공격했고 청국 군함도 반격을 하였는데 이를 ‘풍도해전’이라 부른다.

 

이 해전에서 청국 ‘광을’ 함대는 침몰했고, ‘제원’은 부서져서 여순항으로 돌아갔다. ‘고승호’도 포를 맞고 도망가다 울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풍도해전 이후 일본은 청 군함이 일본 군함에 대해 포격을 했다는 구실로 청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제물포 해전과 러일전쟁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하자 호전적으로 변해 병력을 대거 조선으로 이동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제물포항을 출발해 중국 뤼순항으로 이동하려는 러시아 배 카레예츠호를 향해 포격했다.

 

일본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카레예츠호는 인천항의 중립 해역으로 피항하고 일본군의 발포 사실을 바랴크호에 알린다. 바랴크호는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외국 함대에 일본의 위법적 공격을 알리고 항의했다.

 

2월 9일 바랴크호와 카레예츠호는 이 사실을 러시아에 알리려고 제물포항을 출항했다.

 

배가 팔미도 해상에 이르자 일본 군함이 포격했다. 당시 일본 함대는 순양함 6척, 어뢰정 8척 있었고 러시아는 카레예츠호와 바랴크호 2척 뿐이었다.

 

바랴크호는 큰 피해를 당해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랴크호는 부상자들을 작은 배에 실어 외국 함선에 보내고 러시아군은 배를 침몰시키고 탄약 창고를 폭파해 배를 수장했다.

 

일본은 바다속에서 ‘바랴크호’ 깃발을 건져 자유공원에 있는 ‘인천향토관’ 전시실에 전시했고, 해방 뒤 인천시립박물관의 수장품으로 보관됐다. 2011년 바랴크호 깃발은 러시아에 임대됐다.

 

최근 인천시립박물관 야외에 제물포 해전 러시아 포탄이 전시되어 있다.

 

 

6.25 전쟁과 NLL(Northern Limit Line)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지루하게 진행되다가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휴전회담에서 첫 번째 의제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이었다. 군사분계선 설정을 둘러싸고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유엔군은 ‘현전선’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대치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데 합의했다. 문제는 해상관련 조항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해상 관련 조항은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한강 하구를 쌍방 선박에 대해 개방한다.

2. 휴전협정 발효 후 5일 이내에 상대방의 후방지역, 연안해역 그리고 연안도서로 부터 모든 군대 및 장비를 철수한다.

3. 유엔군사령관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와 우도를 계속 지배한다.

 

연안도서는 ‘전쟁 발생 전 날인 1950년 6월 24일에 각기 통제하고 있던 섬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서해5도에 예외규정을 둠으로써 지상분계선과 불일치가 생겨나고 그것이 문제의 근원이 됐던 것(김보영, 한국전쟁 휴전회담시 해상 분계선 협상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사학연구 제 106호, 2012.)이다.

 

 

한편 한국전쟁 시기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미 육군대장 마크 클라크 장군은 1952년 9월 27일 서해에 외부(외국) 물자보급 및 교역을 차단하기 위해 클라크라인을 설정했다. 휴전 이후 1953년 8월 27일 클라크 라인은 철폐됐다.

 

아군 함정 및 항공기 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규정하고 남북 양측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충돌을 방지 필요성에 의해 클라크 라인을 바탕으로 NLL이 설정됐고, 우리는 ‘북방한계선’이라고 부른다.

 

지난 7월 27일은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99년 연평해전, 2002년 제2 연평해전, 2009년 대청해전, 2010년 연평도 북한 포격 도발 등 아직도 서해에서는 남북한 긴장관계는 계속 되고 있다.

 

김용구 더좋은경제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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