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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경의 예술엿보기] 슬픔이 필요할 때 보는 그림, 마크 로스코

묵직한 삶과 죽음을 그린 마크 로스코

 

내가 그의 그림을 처음 대한 것은 Orange and Yellow(오렌지와 노랑)였다. 캔버스에 오렌지색과 노란색이 반쯤씩 칠해져 있는 그의 그림을 보고 ‘아, 이게 뭐지?’하는 것이 나의 처음 느낌이었다.

 

‘와아~환하다!’가 나의 두번째 느낌, 그때만 해도 로스코는 내게 희망을, 빛을 가져다주는 화가였다. 그를 흔히 색면화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1903년에 태어나 1970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20세기 거장 마크 로스코. 그는 러시아 빈에서 태어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0세에 아메리카로 이주했고, 화가로서의 입지를 세운 뉴욕에서 많은 동료 화가들과 교류하였고, 구상 회화에서 초현실주의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풍부한 색채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추상회화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바네트 뉴먼, 잭슨 폴록과 함께 1950년대의 아메리카 추상회화의 설립자로서 활약하였고, 색채 표현의 가능성을 크게 넓힌 화가이다.

 

1958년에서 59년에 걸쳐 뉴욕의 레스토랑을 꾸미는 시그램 벽화에 손을 댄 이후 대형 화면에 깊이 있는 정신을 표현하는 작품을 담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지만 1970년에 아까운 인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길을 택했다.

 

그 후 2009년 일본 가와무라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말년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가 삶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며 그 묵직한 고통을 그림으로 풀어냈는지 알게 됐다.

 

그래서 그의 말년의 작품들은 어둡다. 그 그림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나의 마음이 슬프다가 아프다가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후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가끔씩 삶이 무료해지고 깊은 슬픔이 필요할 때만 꺼내보는 보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2023 루이뷔통 재단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전시

 

작년 10월 프랑스 여행 중에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의 평생 작품을 아우르는 전시가 있다는 걸 알고 서둘러 그곳을 찾았다.

 

 

전시는 10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일본의 전시가 그의 말년의 작품으로 깊은 사색과 고뇌, 그리고 우울의 극한을 표현한 것이라면, 루이뷔통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로스코의 초기 작품들인 구상화부터 초현실주의 작품들과 과도기 작품인 멀티폼과 다층 형성, 그리고 완숙기의 작품까지 마크 로스코(1903-1970) 전 생애의 작품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였다.

 

로스코의 구상화와 초현실주의 작품들

 

처음 세 섹션에서는 구상화와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색 면화를 보고 이건 초등학생도 그릴 수 있겠다는 망언을 한 사람도 느낄 것이다. 역시 그는 그림의 천재임을.

 

 

구상화 섹션의 작품들은 1930년대를 지배했던 뉴욕 지하철과 같은 친밀한 장면과 도시 풍경을 많이 다루었고, 초현실주의 섹션에서는 고대 신화와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레퍼토리로 전쟁 중 인간 상태의 비극적 차원을 표현하였다.

 

추상작품에서도 그가 사용하는 색과 면처리는 나중 색면 작품과 통하는 면이 보였다. 이 섹션에서는 로스코의 유일한 자화상도 볼 수 있다.

 

추상에서 색면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의 로스코의 작품들

 

 

과도기인 1946년부터 Rothko는 추상화로의 전환을 보이는데, 그 첫 번째 단계는 부유하는 색채 덩어리가 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는 Multiforms의 단계였다.

 

점차적으로 그 수는 줄어들고 그의 그림의 공간적 구성은 노란색, 빨간색, 황토색, 주황색 톤이 특징인 이진 또는 삼진 리듬에 따라 직사각형 모양이 겹쳐진 1950년대의 소위 "고전" 작품으로 빠르게 진화한다. 나는 이 시기의 파랑과 하얀색으로 이분된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로스코의 어두워지는 색면 작품들

 

195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그의 작품은 어둡고 짙어졌다. 그 정도는 점점 강해져서 그의 말년의 작품은 붉은색은 붉은색 대로, 검은색은 검은색 대로 어둡고 강렬해진다.

 

 

그가 색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차마 어떤 형상으로 그릴 수 없었던 내면, 그 내면의 미처 끄집어낼 수도 없는 불안과 공포와 좌절과, 그러나 그러함에도 지울 수 없는 의지와 희망과 몸부림이 온통 색 속에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일본에서 보고 이번에 두 번째로 또 보게 된 Four Seasons 레스토랑의 의뢰로 그린 짙은 붉은색의 벽화 세트 중 9점이 특별 공간에 전시되었다.

 

로스코의 마지막 2년간의 작품들

 

1969년부터 1970년까지의 <Black and Gray > 연작도 우울증, 자살 등과 연관 지을 수 있는 회색과 검은색 작품들이 많지만 이는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는 수많은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열 번째 마지막 섹션이 나에게는 역시 가장 감명이 깊었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더 이상 로스코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그냥 그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것. 어떤 경계도 무너지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 그러면서도 우리의 낱낱의 감정이 단순히 슬프다고만 말할 수 없이 각각 모양이나 빛깔이 다른 것처럼 그의 검은 색도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그가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그의 절망과 그것을 통과하는 과정이 반복되다가 이제 더 이상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지막 그림으로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자코메티의 작품이 함께 어우러져 죽음에 다다른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으로 서슴없이 들어가야 하는 마지막의 결연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섹션에 자코메티의 작품을 함께 배치한 것은 신의 한 수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림을 음악이나 시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기 때문에 화가가 되었습니다 . -마크 로스코-

 

그의 이 말은 단순히 자신이 컬러리스트로 비치길 거부하며, 그가 그림을 통해 얼마나 깊이 관객과 대화하기를 열망했는지 보여준다.

 

슬픔의 카타르시스로 일어서는 사람들

 

이 전시장에서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 몇 장면이 있었다.

 

첫째는 어른도 이해하기 힘든 로스코의 그림을 어린이들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둘째는 어느 남녀 커플이 작품 앞으로 왔는데 남자가 간이 의자를 펴니까 여자가 거기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며 둘이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아버지이고 여자는 만삭이 된 딸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영화나 문학에만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이 아니다.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모든 인간들은 때로 견딜 수 없이 슬프고 외롭다. 그때 삶의 깊은 데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삼키지 않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작품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차분해지며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것이 바로 감정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이 정말 좋은 가장 큰 이유이다. 혹시 그의 원화를 볼 기회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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