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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학문의 라이벌이 남긴 세상: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학문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어떻게 세상을 변모시키는가?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은 영남 성리학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1501년생)였고 퇴계는 경상좌도를 남명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일생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 상대방의 학문을 인정하고 인격을 존중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문(성리학)의 라이벌이었다.

 

남명이 53세(1553년) 때, 그의 학문을 인정한 퇴계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에 임명된 남명에게 벼슬을 하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에 남명은 자신이 벼슬을 할 만한 덕(德)이 없음을 들어 관직에 나갈 마음이 없음을 전한다. 남명이 단성현감에 임명을 받고 이를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다. “왕대비(王大妃)인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명종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외롭고 어린 고아(孤兒)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民心)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라는 내용이다. 명종께서 남명을 처벌하려고 했으나, 조정 신하들의 만류로 남명은 무사하였다. 그렇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 강직한 내용의 사직소(辭職疏)는 전국 유림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들었다. 남명은 당시의 선비들에게 올곧은 선비의 높은 기상(氣象)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한편 퇴계에 관하여 명종실록(1566.2.15)에 보면, “그 성품이 지혜롭고 온유하고… 도학에 전심하고 진리를 체험하고 연구하여 자득(自得)한 바가 많았다.”고 하였다. 그의 졸기(卒記)에도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이후 학문의 정미(精微)한 부분에서 그와 겨룰 자가 없다”고 하였다. 또 퇴계의 학문을 인정한 남명은 퇴계를 “몸소 상등(上等)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많다”고 언급하고 있다. 퇴계는 정주학(程朱學)과 강학(講學)에 주로 관심을 두었고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남명은 강론(講論) 보다는 체득(體得)과 실천을 중요시하였고, 엄격한 출처관과 척족정치(戚族政治)의 피해와 잘못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그후 경상좌도는 퇴계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신적 본산이 되었으나, 경상우도는 1728년 3월 정희량(鄭希亮)의 난 이후 정치보복에 의하여 벼슬길에 제약을 많이 받았다.

 

일제 국권침탈기에는 경상좌도에서는 많은 후학들이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독립유공자들이 배출되었다(안동,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경상우도에서는 1919년에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대표적인 유학자 곽종석, 김창숙 등 137명의 서명을 받은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산청, 유림독립기념관). 나라의 어려움을 당해서 구국(救國)의 길에는 좌도 우도의 구별이 없었다. 그뒤 광복이 되자 경상우도 주민들은 재산과 부(富)의 축적에 눈을 돌려 삼성과 효성, LG와 GS 그룹이 탄생하였다. 경상좌도는 학문과 전통을 중시하여 보수적인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처럼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는 경상도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라고 하겠다. 즉 대한민국을 보다 나은 복지사회로 이끌어 가는 두 개의 가장 중요한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에 대한 시각(視角)의 차이는 이처럼 길고 크게 영향을 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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