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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미망(未妄)과 미망(迷妄). 그리고 미망(彌望)의 관계에 대하여

163. 미망 - 김태양

 

제목의 느낌이 심상치 않은 영화 ‘미망’의 단어 미망은 한자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다 달라지는 개념이다.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는 뜻이고 미망(未妄)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미망(彌望)은 잘 안 쓰는 말이긴 한데 '멀리 넓게 본다'는 뜻이다. 영화 ‘미망’은 이 세 가지 뜻을 각각의 한 단락으로 구성해 이야기를 꾸몄으며 맨 마지막 단어는 장기하의 엔딩 타이틀곡 ‘그때 그 노래’가 나오는 부분에도 반복해 쓰이면서. 단어 미망(彌望)이야말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추구하는 내용과 방향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영화 ‘미망’의 서사는 첫 번째가 ‘迷妄’이고 그다음이 ‘未妄’인데 이 앞 두 얘기는 다소 인트로(introduction)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만큼 다소 습작의 느낌, 아마추어 느낌이 난다.

 

하지만 사실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진짜 에피소드는 3부에 해당하고(러닝타임 90분에서 45분이 할애된다.) 영화 제목에 해당하는 ‘彌望’이며 이 옴니버스 형 영화를 만든 감독 김태양의 본심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시간은 12시에서 다시 12시로 늘 쳇바퀴 돌 듯이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같은 점이라도 위의 원을 조금씩 크게 그리면 같은 꼭짓점이더라도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건 1부 ‘迷妄’에서 주인공 남자(하성국)가 여자(이명하)에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하는 얘기인데 1부의 그 어리숙한 대사를 3부에서 같은 인물들의 변한 모습들을 통해 실제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 ‘점층의 서술’이 돋보인다.

 

반면에 그 얘기는 또 반대로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있어야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변증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그 두 측면, 인생의 변수와 상수를 늘 ‘멀리 넓게 봐야 한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바로 한자어 미망(彌望)을 타이틀로 내세우고 있는 영화 ‘미망’이다.

 

영원한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때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리얼한 느낌으로 다가서는데 3부에 걸쳐 만나고 헤어졌다가 남이 돼서 다시 만나는 두 남녀의 얘기는 안 그런 척 우리가 늘 주변에서, 스스로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뻔한 방식으로 처음에 만나서, 서로를 탐색하고, 그렇게 다 알고 나면 시들해지고 그러다 싸우지도 않은 채 실망해서 헤어지고, 또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만나게 되면 서로에게 좋은 점들을 기억하고 대화하는 관계를 회복하는 식이다.

 

다들 ‘12시에서 12시로 돌아온 사이들’이지만 그래도 ‘멀리 넓게 바라보는’ 관계로 성숙해진 것이다.

 

 

주인공들이 주로 가는 곳은 서울 종로 1가와 종로 3가 그리고 광화문이다. 1,2부에서 종로 3가에 있는 서울극장은 여자 주인공이 영화 모더레이터를 하는 곳으로 나온다. 이 실재했던 극장이 지금은 폐관되고 철거된 것처럼 영화도 3부에서는 그 점에 대해 얘기한다.

 

주인공들과 이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의 배우와 감독들은 영화 속 시간과 실제의 시간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으며 그래서 영화 안팎 모두 다른 시간 대의 다른 사람들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과 있음을 드러낸다. ‘12시에서 다른 12시로 돌아 오고’ ‘늘 같은 장소에 있는 것도 있는’ 존재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극중 인물들이 반복해서 하는 얘기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라는 것이다. 그건 장군이 실제로 왼손잡이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왼손을 쓰는 걸 금기시했기 때문에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얘기한다.

 

남자는 1부에서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여자(정수지)에게도 이순신 동상 얘기를 하며 여자는 2부에서 새롭게 만나게 될 것 같은 팀장이라는 남자(박봉준)와 이순신 장군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 의도된 반복은 ‘12시가 같은 12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전체의 서사는 비교적 단순하고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것을 시간대가 달라지면서 끊어진 이야기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연결돼 있다.

 

연상연하 커플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1부에서 남자는 시종일관 존대어를 쓰며, 3부에서도 여자는 선배 혹은 누나 대우를 받는다.)는 2부에서는 이미 헤어진 것으로 보이고 여자는 아이가 있는 미혼남과 막 연애를 시작하려는 참이어서 다소 불안해한다. 3부에서 주인공 남자와 여자는 택시 기사인 후배(백승진)와 주인공 여자의 친구이자 주인공 남자의 선배의 삼우제(삼오제라고도 함. 발인 후 3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를 위해 한 사찰에 모인다.

 

여자는 2부의 애 딸린 팀장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깊이 사귀고 있으며 남자는 견습 화가가 돼서 그룹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주인공 여자와 남자는 1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 광화문으로 와서 광화문 김치찌개 집이 있는 뒷골목 카페 소우(실제로 있는 식당과 카페이다.)에서 얘기를 나누다 헤어진다.

 

 

이 모든 것(같은 공간을 다니는 반복 행위)은 어쩌면 저예산 공법을 숨기기 위한 필요 전략인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촬영과 조명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을 보면 그게 꼭 돈=제작비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감독 김태양의 의도였으며 공간의 반복과 중복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미학임을 보여 준다. 주인공들은 같은 카페를 배경으로 프레임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어 사라지다가 또 그다음엔 좌측에서 나와 우측으로 나간다. 같은 골목에 들어와서 담배를 피우며 그게 왜 꼭 같은 골목인지는 설명하지는 않더라도 문득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끔 연출하고 있다.

 

결국 둘 모두 그곳을 잊지 못하는 것이며 거기서 무언가를 기억하고 과거의 관계를 떠올리지만 그게 꼭 처연하거나 가슴이 시리거나 할 것까지는 아니다. 버스 안, 작은 카페 안은 자연조명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인공조명을 사용하는데 그 채색의 콘트라스트가 이 영화의 제작이 결코 만만한 세공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세련되고 깔끔하며, 도시적이면서도 젊고 쿨(cool) 한 정서를 지니고 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화 ‘미망’은 마치 홍상수가 일상의 언어를 통해 통찰의 인생관을 피력하려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등장인물들의 비루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통해 사람을 공박하려는 느낌 같은 것을 주지는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종종 사람을 비참한 진실에 마주하게 만든다. ‘미망’은 그러한 작품이 아니다. 세대가 바뀌었고, 세대의 언어가 바뀌었음을 확연하게 보여 준다. 젊은 세대의 감각은 공격적이라기 보다 수세적이며 나서고 떠들기보다는 관망하면서 스스로의 언어를 내면화하는 쪽이다. 영화 ‘미망’이 사람들의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조용한 통찰’이 주는 울림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잊으려 해도 잊지를 못해(未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다(迷妄). 삶과 세상, 관계를 멀리 넓게 바라보느냐(彌望) 여부는 결국 자신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문제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가.

 

영화 ‘미망’은 그것을 넌지시 묻고 있는 작품이다. 또 한편의 수작이 발견됐다. 한국 영화의 상업영화는 죽었다. 오직 독립영화만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미망’이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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