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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부끄러운 시간

 

1910년 8월 29일.

 

조상들은 그날을 왜 망국(亡國)의 상실과 분노, 거대한 슬픔의 날로 규정하지 않고, ‘국치(國恥)의 날’이라고 천명했을까. 그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날도 우리는 모두가 그날을 ‘크게 부끄러운 날’로 상기한다. 참으로 특별하지 않은가.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날, 무너진 가슴을 안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가장이 빈 쌀독을 바라보면서, 그는 가족이 조만간 다 함께 굶어죽을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기 전에, 그보다 더 먼저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였다. 조상들은 그런 족속이었다.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나는 조상들의 그 특별한 마음을 늘 불행 중 ‘다행스러운 자산’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뿌듯해했다.

 

강도에게 가진 걸 모두 털린 사내는 우선 목숨이라도 건진 것을 조상의 음덕(陰德)이라 여기고, 정신 차리고 나서 그 상실을 아까워하고 분노하고 두려움에 떨며 걱정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맨 먼저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 일제 35년은 이 민족이 그 ‘큰 부끄러움’을 줄이고 또 줄여서 끝내 제로로 만들려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망국의 슬픔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공동체의 정신으로써, 그리고 국권회복의 목표를 위해서도 그 수치심은 강력한 에너지였다. 큰 지혜이기도 했다. 이 민족이 세상에 보여준 고결한 자존감이었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왜놈들과 탐관오리들에게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새끼들에게 그 모욕적인 신분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수십만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저 북만주로 피난을 떠났다. 그 생계형 이주민들이 훗날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성으로 내놓은 푼돈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으로 쓰이는 과정을 생각하면 언제나 뭉클하고 눈물겹다.

 

그 조상들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생활을 현저하게 개선하고, 여러 가지 문제점과 아쉬움, 일상적인 불안을 늘 곁에 두고 살면서도 듬직하게 정착했다. 그 억척스런 살림살이와 특유의 생존력으로 살아남은 세월은 훗날 간도를 국권회복을 위한 베이스캠프로 건설하는 위대한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특별한 부끄러움은 ‘경술국치’(1910년) 300여 년 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게 낸 출사표에서도 확인된다. “원컨대 한번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즉시 범의 소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기운을 쓸어내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일이나마 씻으려 하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나라가 망하거나 그 조짐이 보일 때 그 특징은 예외 없이 발현된다. 두드러진다. 각종 동식물들의 종(種)이 ‘존재의 위기’에 처하면, 몸의 색깔을 바꾸거나 특정물질을 분비하여 위난(危難)을 돌파하듯이, 우리 민족은 마치 그 자연법칙처럼 ‘부끄러움’을 생존에너지로 치환하여 뛰쳐나갔다.

 

왜란(倭亂) 때도, 호란(胡亂) 때도, 경술국치 망국 전후 그 지옥의 시간에도 늘 똑같았다. 윗자리에서 군림하며 거들먹거리던 종자들, 심지어 임금까지도 시정잡배들처럼 도망쳤지만, 민초들은 낫과 쇠스랑, 돌팔매와 죽창과 활로 신식무기와 맞서고, 여인들은 치마에 돌맹이와 먹거리를 날랐다. 아들은 총맞아 죽은 어미의 젖을 빨았다. 국난 때마다 조상들이 그렇게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철학자 맹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무수오지심 비인야. 無羞惡之心 非人也), 라고 갈파했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惻隱之心), 겸손하고 친절한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지니고 살지 않으면, 그 역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실로 단순명료한 인간론이다.

 

60대 중반 넘도록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언제나 존경스러워 본받고 싶은 인사들 소수가 있었다. 그들은 늘 부끄러운 일을 경계했다. 그들과 대칭에 있는 자들의 공통점은 후안무치(厚顔無恥)였다. 특히 돈 앞에서 저열하고 쌍스러웠다. 기자와 정치판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천박한 모리배(謀利輩)들이었다.

 

자존감 높은 족속은 부끄러움과의 싸움에서 가장 질긴 법이다. 그 과정에서 기나긴 시간 동안 크고 작은 고통과 절망의 기억들이 쌓이고 또 쌓인다. 이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공동체는 그렇게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의 선물이다. 목숨을 던져 얻은 고품격이면서 큰 지혜다. 이 미덕을 귀한 가보(家寶)처럼 이어간다면 그것이 이 특별한 민족의 유전자로 내장될 것이다.

 

12.3 계엄사태 이후, 이 나라 착한 씨알들,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비폭력 저항운동은, 이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먹구름처럼 짙게 드리워진 음울한 시대에 밤하늘에 쏘아올린 조명탄이다. 그 위대한 민초들 앞에서 윤석열 일당, 그 한 줌도 안되는 5류 정치낭인 무리가 보여주는 야비하고 졸렬한 작태는 이 특별한 공동체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네티즌 의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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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풍
    • 2025-01-09 13: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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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러워라 ~~~~ ㅠㅠ

  • 귀로
    • 2025-01-09 12: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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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단순 논리가 작동 하었으면 합니다.

  • 김일광
    • 2025-01-09 12: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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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병이 나서 몸이 계속 안좋아지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선조들은 어떻게 버텼을까요. 그래도 참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오겠지요. 그날까지...

  • 조호진
    • 2025-01-09 11: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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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만 곤고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삶 또한 곤고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럼에도 곤고한 처지에 함몰되지 아니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망상의 환자를 처단하기 위해 엄동설한의 추위에 맞서는 이웃들이 있으니 감사하고 감사하다. 삶의 곤고함에서도 빛나는 칼럼으로 부끄러움을 일깨워주시는 오세훈 칼럼니스트에게 존경의 인사를 올린다. 2025년에는 좋은 일이 많으시기를 빕니다.

  • 영희
    • 2025-01-09 10: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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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인간 극단의 치졸함을 보는 날들이 이여지고 있습니다.이 땅의 위정자들이 개혁된 마음으로 사람다운 정치가 이여 졌으면 합니다.간절히 소망합니다.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죽비소리 같습니다

  • 싹갈아
    • 2025-01-09 1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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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이건 이재명이건 싹 갈고 새로운 리더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은 정치 경험이 없어 허둥대고 있고 한 사람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흠결이 너무 많아서... 정치 지도자 자산이 풍부한 나라가 되어야 할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1류 국민 2류 경제인 3류 정치인 이게 거꾸로 되어야 하는데... 언제 그날이 오려나.

  • 마니산
    • 2025-01-09 08: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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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난을 겪을때마다 굴종하지않고 부끄러움을 이겨내는 민초의 정기가 역사를 꿰뚫고 있습니다
    지금의 내전을 반드시 이겨내서 모리배들이 설쳐대지 못하는
    진정한 민초의 나라가 자리잡길 간절히 바랍니다

  • 쉬어가기
    • 2025-01-09 08: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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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수신제가치국'을 생각한다.
    술먹고 대노하느라 수신없고,
    함께 거주하는 요망한 사람의 가스라이팅이 없으면 유투브나 보느라 제가도 없는 사람이 어찌 치국을 탐했는가!
    '무실역행'은 없고 '충의용감'도 없이 음주유투로 살았고, 이제는 무법저돌만 남은 꼴이다.
    살아오며 쌓아온 내 그릇의 한계를 알고, 분에 넘치는 자리에 감사하며 스스로를 단련해야 했건만, 넘쳐나는 욕심에 국가와 시민을 치욕 속으로 밀어넣는 윤가 모지리.

  • 가가
    • 2025-01-09 08: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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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운 날들이지만 모두의 밑낯이 낱낱이 ㄷ
    러나는 시간이 와서 기대가 큽니다. 누가 어떤 길에 서 있는지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확실해 질 것 같습니다. 지켜보고 있다가 확실하게 과거가 청산되는 기가막힌 를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린 이 부끄럽고 수치스런 시간을 잘 견뎌내야 합니다.

  • 우보
    • 2025-01-09 07: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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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오지심 비인야.
    이번 주, 강력한파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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