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편의 시와 시조는 그 사람 정신적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라는 시조는 만고의 충신 성삼문의 푸른 혼으로 지금도 내일도 서슬 퍼렇게 살아 있을 것이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왕명을 맡아보던 예방승지 성삼문은 임금의 인장(印章)인 국새를 안고 통곡을 한다. 그 뒤 성삼문은 세조와 그 일당을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역모 죄로 한강 백사장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때 성삼문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절개를 낙락장송에 비긴 시조를 남기고 갔다. 이것이 인문학 정신이요 문학의 정의이다. 문학은 어떤 형태로 나타내든 결국은 자기 삶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종(種)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아 쿠랑은 말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 걷는다는 것은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인간은 걸으면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기도 한다.
아침 산책길에서 본다. 길에 떨어져 있는 고목나무의 부러진 가지를. 나무는 지난밤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지를 내려놓은 것이다. 밤 시간 나는 자리에서 뒤척일 때 산은 산대로 숲은 숲대로 나무는 나무대로의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다. 시간의 흐름 앞에 영원한 생명의 주체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새삼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나간 대신 땅속에서는 지신(地神)의 조화로 봄기운이 나무뿌리를 기점으로 역으로 줄기를 타고 오르며, 그 물줄기로 나무 표피를 윤택하게 하는 동시에 나무 가지 끝에서는 눈을 트게 하고 잎을 벌게 하여 새봄의 숲 환경을 새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삼월은 그냥 3월이라고 하지 않는다. 삼자 앞에 봄 춘(春)을 붙여 ‘춘삼월’이라고 한다.
삼월을 앞두고 나는 어느 시인의 유튜브에서 3⭒1운동에 따른 새로운 분위기를 읽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장로교 7명, 감리교 9명으로서 16명이 개신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0년을 지나면서 개신교인은 침례교인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신사참배를 하고 친일부역을 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배 때마다 황국신민으로서의 애국! 을 설교하고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동방오배(五拜)를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어디로 다 도망가고 동네에서 맞아 죽게 되자 바짝 엎드려 있다가 이승만과 결탁 서북청년단 등으로 활동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뿌리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집에서 흰 도화지 위에 사발(국그릇)을 엎어서 큼직한 원을 먼저 그렸다. 그리고 그 원을 〜 이와 같이 표시하여 반으로 나누어서 위에는 붉은색을 아래는 군청색을 칠했다. 네 귀에는 괘를 만들었다. 끝맺음으로는 손으로 잡아 흔들 수 있도록 가는 대나무로 묶어가지고 학교로 가지고 가서 기념식 때 교장선생님이 선창 하면 우리는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그때 그 힘으로 오늘날 여기까지 왔으며 한강의 기적과 수출 강국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3월이 되면 외로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유관순 누나가 참으로 내 누나나 된 양 보고 싶었다. 그 누나는 나이도 먹지 않고 항시 1919년 3월의 그 나이와 모습으로 어느 곳에서 존재할 것만 같았다.
내게 하나의 꿈이 있다면 담백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욕심 없이 조촐한 마음으로 손자가 등교하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다. 배우자를 잃고 자신을 벗 삼아 살아가는 친구와 산길을 걷고 싶다. 그러나 눈을 밖으로 돌리면 지도자 복이 없는 이 나라의 현실적 슬픔 속에서 성삼문 같은 사육신의 정신과 자신의 절개를 낙락장송에 빗대는 시와 시조 한 수 짓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서글퍼진다. 바라 건데 우리나라가 서울대학에서 법을 공부했다는 사람들로 인해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언제쯤 나라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보다 앞선 나라가 될지… 행복은 권력이나 돈보다 지혜를 따르는 법(道)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