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혼자 살기 꽤 괜찮은 세상이다. 어쩌면 너무 괜찮아서 조금 이상할 정도다. 굳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하루가 굴러간다. 배달 앱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은행은 손바닥 안에서 끝난다. 장을 보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택배는 문 앞까지 온다. 심지어 외로움조차 사람을 통하지 않는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이쯤 되면, 세상이 점점 더 혼자서 살아가도록 진화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자’라는 말이 자꾸 걸린다. 내가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정말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내가 주문한 음식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들어 있고, 인공지능의 문장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식과 시간이 겹쳐 있다. 나는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타인들의 어깨 위에 기대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 불렀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온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한다. 느낌은 좀 다르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처럼 느껴진다. 마을 광장은 사라졌지만, 대신 더 촘촘한 네트워크가 생겼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넓고 얕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닿아 있다.
문제는 이 연결이 너무 매끈하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너무 쉽게 연결되고, 너무 빨리 반응이 돌아온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사람의 존재가 지워진다. 그래서 그 무게를 자주 잊는다. 내가 던진 말 한 줄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남는지, 내가 누른 버튼 하나가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잘 상상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책임감은 희미해지고, 어딘가 무심해진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여전히 마을에 모여 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면서도, 혼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서있다. 누군가의 어깨에 내 체중을 싣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누군가도 나에게 조금은 기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약간 불편해진다. 동시에 조금은 조심스러워진다. 이미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면, 굳이 더 날을 세울 이유가 있을까 싶어진다. 거창한 연대나 희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고 있다면, 조금 더 나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다. 내가 닿는 자리만이라도, 말하자면 조금 덜 차갑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혼자 살기 좋은 시대라고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말이 정확하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덜 의식해도 살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이미 충분히 얽혀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면, 차라리 서로에게 조금 더 괜찮은 이웃이 되는 편이 낫겠다. 대단한 선의를 베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내가 기대고 있는 이 세계가 누군가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내 어깨에도 아주 잠깐은 몸을 기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요즘 나는 그 정도의 태도만이라도 지키며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