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헌법재판소는 박근혜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다음은 그 이유를 밝힌 판시(判示)의 한 대목이다. ‘헌법 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였습니다.’ 세계챔피언이었던 왕년의 권투선수 홍수환, 1977년 11월 도전(挑戰)전 2라운드에서 4번이나 다운됐다. 3라운드에서 ‘지옥의 투사’라던 챔피언 카라스키아의 턱과 배를 통렬히 때려 눕혔다. 칠전팔기(七顚八起)를 떠올리는 ‘4전5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신화(神話)’의 대명사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아들의 고함에 절규하듯 엄마는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소리쳤다. 이 대목, 곧 얘기 거리가 됐다. 왜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고 ‘대한국민 만세’냐 하는 시비(是非)였다. 기억에 따르면, 당시 신문 등은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기뻐서 생각 없이 내지른 말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낭독한 이번 판결에 엄연(儼然)히 존재하는 ‘대한국민’도 그러할까? 우리나라 이름의 본디는 대한(大韓)이다. 구한말 고종황제는 그 이름에 제국(帝國) 칭호 달아 ‘대한제국’ 깃발을 세웠다. 다음 시대
검색의 시대, 클릭 몇 번으로 세상 일 다 알고 해결 가능하다 여겼나. 허나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경험한다. ‘앞으로 어찌 될까?’ 또한 마찬가지. 클릭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유와 다음에 오게 될 세상을 짐작하는 것에도 클릭은 역시 무능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클릭 밖에는 방법을 가지지 못한 것인가. 스마트폰이 대신 해준다고 여겼겠다. 뭐든 치면 나오지 않던가. 이제 인공지능(AI)까지 ‘거인의 어깨’를 가볍게 밟고 날아오르는 듯, 심지어 그걸 만든 이들마저 당황하는 모양새다. 어떤 낱말이 어찌하여 저런 뜻을 가지게 됐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저 스마트한 장치들이 어원풀이도 꽤 하더라만, 한계 있더라. 기왕의 자료를 긁어모아 해(解 풀이)와 답(答 대답)을 내는 것이니 아직은 불가피하리라. ‘짐작’을 예로 들자.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이 사전의 풀이다. 15세기 옛 문헌에서 그 활용의 초기 사례가 보이는 한국어인 짐작은 왜 저런 뜻을 갖게 됐을까? ‘짐작’에 ‘한국어’란 앞말을 붙인 건 ‘한자를 속뜻으로 하는 우리말(어휘)의 한 갈래인 한자어라는 점’을 드러내려는
이럴 때 꼭 나오는 말이 ‘불출’이다. 아마 한자로는 아니 不에 나올 出쯤 되리라. ‘계엄당국’이 작성한 것으로도 알려진, 수거(收去)해서 척결(剔抉)할 500명 리스트는 ‘시대적 해석’이 필요하다. 그 명단에도 들지 못한 이들이 요즘 스스로를 냉소적으로 불출이라 부른단다. 이번 시태에만 국한된 것은 물론 아니다. 국어사전의 불출(不出)의 뜻은 ‘밖으로 나가지 아니함’이다.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과 이어지겠다. 저기도 못 끼니 마땅히 두문불출해야 할 정도로 못난 사람이라는, 자기비하의 비아냥일 터. 차별과 비하의 의미가 포함됐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문구가 붙은 두 번째 설명은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아하, 저 비아냥의 뜻과 상통하는 군. 하여간 (중요한) 유명인 리스트다. 그 중에는 당장 체포할 이들도 있다. 처음에 세상(언론)은 수거라는 ‘희한한 용어’에 놀라더니 낱낱의 그 이름들을 보고는 자못 정색하는 표정이다. 저 명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이겠다. 이는 ‘이번 사태의 불출’을 정의하는 (정서적) 기준이리라. MBC 한겨레 경향 등을 참고해 내용을 정리해 보자. 노 전 사령관이란 자의
‘악법도 법이다.’와 같은 법언(法諺·법 관련 격언)만 해도 으스스한데, ‘법 위의 법’이라는 헌법(憲法)이 있단다. 계엄-탄핵 사태에 어문학적으로 헌법을 톺아보자. 요즘은 ‘군사경찰’이지만, 예전에 헌병(憲兵)이라면 높고 낮은 계급의 장병들이 괜히 떨었다. 물론 그 이름은 왜놈들 치하의 찌꺼기(잔재)였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에 울려 퍼진 선언, 국민과의 약속을 헌 신발짝 삼은 권력에게 저 위엄은 추상이었다. 그래서 또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다. 헌재는 헌법을 다룬다. 헌병의 ‘헌’도 그 憲자다. 썩었다 싶으면 가을 서릿발처럼 대통령도 패대기치는 ‘어마무시’한 헌재의 시간이 다시 왔다. 다음은 헌법의 (사전적) 의미다. - 국가 통치체제 기초에 관한 근본 법규의 총체. 국가의 법의 체계적 기초로서 국가 조직, 구성 및 작용에 관한 근본법이며 타 법률이나 명령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최고 법규다... 憲자의 고대로부터의 뜻은 ‘법규(法規)’ 보다는 보배우는(보고배우는) ‘모범’에 가까웠다. 배우고 따라야 할 ‘길의 이치’ 즉 도리(道理)의 개념으로 생성(生成)돼 쓰였다(고 본다). 오늘날 憲의 훈(訓)과 음(音)은 ‘법 헌’이다. 法의 한 가
‘5월 광주’를 아는 어떤 이가 뉴스를 보았다. 찬찬히 세수했다. 이게 마지막 재계(齋戒)는 아닐까. 계엄이란 이름의 군사반란을 또 보는구나. 비장한 길을 나섰다. 천지신명이여, 선배가 앞장설 기회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후,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지난다. 여의도의 인파, 젊은 여성들 한 동아리가 “와, 아저씨도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응원봉 흔들어 환호했다. 그렇지, 그들(몫)의 세상이지. 마음으로 축원했다. 상황의 그런 변화는 진화(進化)일 터다.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四字成語), 계엄 전에 뽑았다는데 우연이었나? 도량(跳梁)과 발호(跋扈)를 묶은 1위작 도량발호는 황당한 저들의 행태를 제대로 찍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와 석서위려(碩鼠危旅)가 뒤를 이었다. 셋 다 상황에 딱 맞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어려운 밤’을 떠올리다 문득 생각했다, 계엄 후에 선정 했다면 1위로 전전반측(輾轉反側)이 뽑히지 않았을까 하는 발상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비통과 무력감은 도량발호를 넘어서는 특선작이 될 수도 있었으려니. ‘저 몇 사람의 도량발호’보다는, ‘나(우리)의 전전반측의 총량’은 얼마나 참혹한가. 작년엔 ‘이끗 보더니 의리 잊더라’는 견리망의(
돌림자처럼 ‘농’자 든 세 낱말, 농단 농간 농락 등은 비슷해 보인다. 같은 뜻으로 아는 이도 있겠다. 그러나 이 말들은 각각 다른 단어다. ‘시대언어’인가? 박근혜 정권 말기처럼, 요즘 큰 유행인 ‘국정농단’의 농단(壟斷) 말이다. ‘깎아 세운 듯한 높은 언덕’이란 뜻이다. 사전에는 이런 풀이도 있다.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하는 것. 시장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물건을 사 모아 비싸게 팔아 이익을 독점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란다. 농간(弄奸)은 ‘속이거나 남의 일을 그르치게 하려는 간사한 꾀’ 즉 사기다. ‘손으로 만지며 논다’는 농(롱)과 ‘간사하다’의 간의 합체다. 희롱 우롱의 弄이 핵심 의미다. 농락(籠絡)은 ‘새장과 고삐’라는 뜻, 남을 교묘한 꾀로 휘어잡아 제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시쳇말로 ‘가지고 논다’는 말이다. 대충 바꿔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은 아니다. 한자(漢字)도 다 다르다. 계통이 같거나 비슷한 말로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그러나 공공(公共)의 도리나 개인 간의 이해(利害) 등 여러 세상사에서 품격이 현저히 떨어지는, 악질 또는 저질적 행실인 것이 셋의 공통점이다. 언론 등 현장에서의 단어의 용례(
“축제에 웬 고사? 안 어울리게...” 축제의 개막, ‘고사’ 순서에 내로라하는 이들이 한복입고 나와 절과 술잔 올리더라. 이렇게 의아해 하는 축은 아무래도 젊은 층이다. 이태원 참사의 그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게 축제 아니냐, 그런데 왜? 멋진 파티, 잔치 분위기 축제에 꿀꿀하게 돼지머리에 절을 하다니, 대충 이런 볼멘소리다. 카니발(carnival) 피트(fete) 피에스타(fiesta) 피스트(feast) 페스티벌(festival) 주빌리(jubilee) 등 멋지게 들리는 외국 이름의 잔치라야지, 웬 고사야. 축제는 축제다워야지... 설레고 좋은 일, 상서로운 느낌이나 ‘노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이 그런 느낌 불렀겠다. 그런데, 말의 뜻을 보면 뜻밖의 사실과 만난다. 어떤 게 ‘축제다운 것’인지 그 본디를 볼 일이다. 문자(글자)에 그 뜻이 있다. 외국 산(産) 저 ‘파티’들의 의미도 다시 볼 일이다. 저 축제의 이름들은 여러 지역에서 자신들의 신(神)에게 뭔가를 바라는 기원(祈願)의 이름들이다. 세상의 어떤 유명한 신도 처음에는 자기 동네 특유의 (토속적인) 기원의 대상이지 않았던가. 종교나 신앙이라고 하는, 더러는 무속(巫俗)이라고, 좀 비하해
과거-현재-미래를 이르는 다른 이름인 어제-오늘-내일 중 하필 내일만 한자로 된 말이어서 늘 얘깃거리가 된다. 그 來日은 ‘온다’는 뜻의 한자 래(來)와 해(태양)를 이르기도 하는 말인 ‘날’ 일(日)의 합체다. ‘내일’을 대신할 ‘하제’란 말이 최근 젊은이들의 생활언어로 펴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을 찾아 복원하는 일은 의미 있다. 이 말은 고려 때 중국 사람이 쓴 고려 말(언어) 교본(계림유사)에 명일왈할재(明日曰轄載)라는 대목을 주목하여 우리 언어학이 찾아낸 것이다. 고려시대 당시 내일(의 발음)이 ‘하제’였다는 것이 문자학자 故 진태하 교수의 연구결과다. 저 대목은 ‘고려 사람들이 명일(明日 내일)을 ’할재‘라고 하더라(曰 왈)’는 중국 사람의 기록이다. ‘할재’의 당시 중국말 발음이 ‘하제’였다는 것이 진 교수 연구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고려 때 사람들은 내일은 하제라고 했다, 즉 당시 내일 뜻의 우리말(발음)은 하제였다는 것. 소리를 표시하고자 활용한 말이니 ‘할재’의 의미를 따지는 건 의미 없겠다. 비슷한 말이 또 있다. ‘하제’와 발음이 비슷한 ‘아제’가 ‘내일’의 원래 우리말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광복절 앞둔 지난 14일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 일본제국주의 강점기를 미화한 영상을 상영한 교사가 경고 조처에 이어 수업에서 배제됐다. 학교장은 사과했고, 시교육청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고 했다. 보도된 내용이다. 그날 전교생 700여 명 중학생들은 60대 교사가 튼 일제강점기 관련 12분 가량의 동영상을 당혹감 속에서 보았다. 이 영상물은 ‘오늘날 한국인 대부분의 인식과는 달리 총독부가 한반도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많은 투자를 했다’, ‘일제에 의해 사법제도가 정비되고 개인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일제가) 한반도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깨어나게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일제가 뿌렸을 법한 속 검은 소문, 지들이 이러저러한 혜택을 주었다는, 뻔한 식민지근대화론이었다. 노골적 '친일' 주장에 학교는 뒤집혔다. 학생들이 항의했고, 학부모들도 '편향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보도된 내용이다. 장황하게 보도를 인용한 것은 이런 사태가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을 교사에 의해 빚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의 논의 이전에, 알 만한 이들이 초보적인 경제 개념을 몰랐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있을 법하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 중
얼마 전 KBS 라디오 고전음악 채널 ‘클래식 FM’에서 진행자의 황당한 얘기에 놀랐다. 서양음악만 틀다가 유일하게 우리 음악을 들려주는 ‘FM 풍류마을’ 시간, 큰 작곡가로 가야금 명인인 전(前) 이대 교수 고(故) 황병기 선생의 ‘침향무’를 들려주면서 곁들인 설명이었다. “침향은 ‘외국’에서 들여오는 향의 이름입니다”라고 했다. 외국에서 사오는 것이라는 얘기다. 운전 중에 얼핏 들었던 터라 ‘인도(인디아)’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야금 곡인 황병기 작곡 ‘침향무’의 침향이 인도나 아니면 다른 외국 어떤 나라에서 (현재) 수입되는 향(香)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설명이었다. ‘몸에 좋다’는 물질(제품)은 유행을 탄다. 미용도 정력 강장도 그렇지만 요즘은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이 이런 유행 이끈다. 경험 상, 오래 가지는 않는 ‘돈벌이’ 관련 유행이다. 패션(fashion) 축에도 못 끼는, 영어로 패드(fad)라고 하는, 스쳐 지나는 짧은 유행일 터다. ‘메뚜기 한 철’ 같은 그런 제품의 속성 때문에 두루뭉술 장점(長點)만을 강조(과장)하는 것이 이런 제품 광고의 특징이다. ‘침향*’과 같이 침향이란 것이 ‘몸에 좋다’는 온갖 유혹적인 언사(言辭)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