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경기 광주(廣州)는 길게 [광:주], 광주(光州)광역시는 짧게 [광주]일까? 며칠 전 KBS 라디오 ‘클래식 FM’의 국악 프로 ‘풍류마을’을 듣다 황당했다. 진행자가 “... (아무개 씨가) 소금을 분다”고 말했다. 혹 “소금을 탄다” 했는지도 모르겠다. 얼핏 흰 소금을 (입으로) 불거나 (손으로) 음식에 타는(섞는) 것을 상상했다. 음악 얘기이니 악기 소금(小笒)이면 (피리처럼) ‘~을 분다’, 소금(小琴)이면 (가야금처럼) ‘~을 탄다’고 했겠다. 그런데 짧게 [소금]이라 했으니 소리가 같은 짠 [소금]과 구별할 수 없었다. 방송이 틀린 것이다. 불든(吹奏 취주) 타든(彈奏 탄주), 소(小)는 긴소리(長音·장음)로 [소:금]이라 해야 맞다. 선거 때 방송에서 이 ‘광주’와 저 ‘광주’가 대체로 구분 없이 (대개 단음 [광주]로) 마구 튀어 나왔다. 경기도엔 광주(廣州)시가 있고 남도에는 광주(光州)광역시가 있다. 평소에도 방송 등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빚는 주제다. 그렇다고 매번 ‘경기도 광주’ ‘광주광역시’ ‘남도 광주’ 이렇게 부르기도 번거롭다. 그리 부르더라도 바른 발음은 챙겨야 한다. 한글 철자가 같아 생기는 사달이다. 구별이 어려워 저 ‘광
정치 계절, 요즘 자주 듣는 말 재승덕박(才勝德薄), ‘재주는 많은데 덕은 부족하다’는 뜻이다. 전엔 꾸중이었다. 어른의 저 말씀은 무서웠다. 인격포기의 (최종적) 판단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다른가. ‘사람이, 깊이가 있어야지...’ 하는, 부정적 평가임은 여전하다. 가령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의당 ‘덕이 부족한’ 이는 아웃이다.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깊이는 좀 부족해도, 재주는 뛰어나니 그나마 써먹을 구석이 있겠지’하는 기분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요즘 말뜻도 짐작되는 분위기다. 부끄러움 모르는 사람들이 나란히 윗줄에서 요란 떠는 세상, 재주 있어서 인기만 높으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랴. 재주가 힘(권력 또는 주먹)도 갖췄다면, 이는 진짜 잘나가는 것일까? 우기면, 거짓말도 억지도 진실처럼 언론에 나가는 걸 보면, 세상은 어디로 흐를까? 아서라, 애들 볼라. 다음 시기에 저런 이들 얼마나 꼴사나운 비난의 대상되어 세상을 웃길까? 재승덕박의 원래 말 재승덕(才勝德), 재주(才)가 덕성(德)을 이긴다(勝)면, 막말로 막가는 세상이다. 하릴없이 골로 가리라. 다만 시간의 문제다. 백 살쯤 살면 철들었을 테니 알겠지. 말에는, 동
말 속에 뼈가 있다는 언중유골의 골(骨 뼈)은 비유의 재료다. ‘가시 돋친 말’ 따위의 여러 쓰임새가 있다. 그런데 어떤 형태로건 ‘언중유골’은 그 소리만으로 뜻을 펼 수 없다. ‘말(言) 가운데(中) 있는(有) 뼈’라는, 말의 바탕을 지탱하는 의미의 문자를 새삼스럽게 보자는 것이다. 한글은 소리내기 또는 소리를 기록하기에 적당하다. 한글로 표기되는 한자(어)는 의미를 담거나 빚어내기에 적당하다. 이 두 장점의 합(合), 한국어가 우수한 언어인 까닭이다. 물론 한자어는 ‘오픈’이나 ‘뉘앙스’ 같은 외국어 바탕 외래어(外來語)와 어법상 성격이 같은, 한국어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수교(修交) 외교(外交) 국교(國交) 등도 다 그렇다. 우리나라가 쿠바와 국교를 맺었다, 즉 한국과 쿠바가 수교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언론의 주목은 당연하다. ‘국교’(외교관계)를 맺는(修) 것이 ‘수교’다. 여기서, ‘수교를 맺었다.’는 말은 기자나 외교부 등 언어생산자 또는 전문가 집단이 쓰기에 적절하지 않다. ‘수교했다’라야 한다. 외교부도 초롱초롱한 말로 발표해야 하고, 보도하는 언론도 또록또록한 개념으로 전해야 한다. 기껏 ‘말 정도’ 가지고
사이비는, 생활에서나 공부에서나, 경계(警戒)하여야 할 대상이다. 사이비종교 사이비기자 등 그 경계의 사례를 보여주는 어휘들이 수두룩하다. 서양문물의 영향 때문에 동아시아 문화의 거대한 상징인 용(龍)을 드래곤(dragon)이라고 번역한 것도 물론 사이비다. 새해 ‘청룡(靑龍)의 해’를 ‘이어 오브 블루 드래곤(Year of Blue Dragon)이라고 쓴 여러 (영문) 매체를 보면서 느낀 생각이다. 우리에게는 드래곤(이라는 상상 속 동물)이 없다. 서양에는 龍(이라는 상상 속 동물)이 없다. 어쩌다 언제부터인지 용을 드래곤이라고 번역하고, 시간 지나도 그 번역이 황당하다 생각하는 지적이 없었음이 신기하다. 개는 도그(dog), 계란은 에그(egg)지만 용은 드래곤이 아니다. 그럼 뭔가, 용은 용이고 영자(英字)로 적자면 ’yong’이다. 청룡처럼 [룡]으로 발음될 때는 ‘ryong’으로 적으면 된다. dragon이 드래곤인 것도 같은 이치(理致)다. 번역할 필요가 없는 개념이나 사물인 것이다. 단군 할아버지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하려는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인공 제우스나 디오니소스를 어떻게 번역하려는가.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단군은 겨레의 시조(始祖)로
주요 방송의 날씨(일기예보)는 대개 용모(容貌) 단정, ‘날씨요정’ 별칭으로도 불리는 젊은 여성들 차지다. 영어권에서도 일기담당자(전문가)라는 미티오랄러지스트(meteorologist)라는 (공식)명칭이 있는데도, 꽃나이 묘령(妙齡) 여성이면 ‘웨더 걸’이라 부른다. 어디서나 ‘그 세계’는 경쟁의 도가니라고 한다. 선후배 간 소통방식이나 규칙, 어휘(語彙) 활용법 등의 내림(전통)이 있겠다. 허나 어떤 때 (좀 있어 보이는) 어떤 말을 누군가 쓰기 시작하고, 시청자에게 먹힌다 싶으면 다른 이들도 경쟁적으로 따라한다. 일반 시민의 언어생활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한다. 때로 어색한 말이 (그 동네에서) 돌다가 하릴없이 사그라지는 것도 관찰된다. 방송의 언어는 시민의 ‘말글 선생’이어서 공공(公共)언어로서의 역할(책임)을 잊으면 안 된다. 겨울 되면서 ‘온화하다’는 말이 날씨요정들 사이에 유행을 타는 듯하다. 들어보니 ‘온난하다’의 뜻으로 이 말을 대충 질러버리는 모양새다. 계절에 비해 따뜻한, 그러면서 햇살도 좋아 산책이라도 즐길만한 날씨가 온난(溫暖)이겠다. 온화는 ‘편안하다’는 穩을 쓰는 穩和와 ‘따뜻하다’는 溫을 쓰는 溫和의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온
‘미래를 마중하는 당신의 배려’ 지하철 어떤 좌석의 글, 시(詩) 구절 같은 비유다. 멋진가? 말과 글(다루는 일)이 직업인 사람도 갸우뚱하는 말이라면 보편성은, ‘꽝’일 터. 주위의 몇 사람에게 물었다. 미래를 마중한다?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아기 밴 여성을 위한 자리이니 앉지 마시오.’라야 했다. 공공(公共)의 언어에서 가장 보기 싫은, 저질스런 대목이 바로 저런 있는 체, 유식한 체다. 당신의 높은 교양과 일반의 수준을 착각하지 말 것. 말글은 뜻을 전하려고 있다. 혼자 ‘잘 썼다’며 자위하려는 따위의 글은 우리의 세금 낭비다. 실례되는 짐작이지만 십중팔구, 그 이상은 베낀 글이다. 표절 절도이니 정직성도 ‘꽝’일러라. ‘인문학’이란 단어 자주 본다. ‘인문학의 홍수’인가. 허나 인문학의 첫 계단인 문자(文字)와 문장(文章)을 밝고 확실하게 사용하는 대목은 ‘글쎄요’다. 옆에는 임신한 여성을 나타낸 듯한 추상적인 도안(디자인)이 그려져 있다. 제목은 ‘임신부 배려석’이다. 그런데 열(10)에 넷(4) 이상은 ‘임산부 배려석’이다. 물었다. 임신부와 임산부는 같은가요? 글쎄요, 같겠지요, 몰라요, 오마 참 이상하다. 효과 얻으려면 임신부도 ‘아기 밴
인류의 위기 앞에서 한창기 선생(1936~1997)을 떠올린다. 국제적 감각의 비즈니스맨으로 역량도 다방면으로 뛰어났다. 세상일 특히 언어부문에 깐깐한 ‘문화인’으로 살았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기리는 한글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까닭이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1980년 전후 엄혹한 시기에 그는 우리 문화를 크게 떨쳤다. 서울법대를 나온 이의 일반적인 행보(行步)가 아니었다. 미국인보다 유창하달만큼 영어를 잘했다. 주한 미군과 가족, 한국의 외국인과 ‘영어 좀 읽는, 잘 사는’ 한국인들에게 (비싸기로도)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아주 잘 팔았다. 그의 실적과 성과에 고무된 브리태니커 미국 본사를 움직여 문화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세우고, 사장이 됐다. 이를 토대로, 남과 다른 생각과 정서를 펼치는 데 거침없었다. 그 역량을 개운하고도 새뜻한 언어로 그려낸 점도 독보적이었다. 신화적인 잡지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그리고 그가 만든 많은 책들은 ‘뜻’으로 독자를 설레게 했다. 글도 꽤 많이 썼고, 실질적인 편집자 역할로 기자들을 비롯한 필진들과 ‘이녁의 고집’을 공유했다. ‘민중자서전’과 인문지리지인 ‘한국의 발견’
책 ‘1402 강리도’의 의미와 재미를 전해드리겠다고 전에 언급했었다. 좀 늦게 이제야 그 기억을 치켜들었다. 두툼한 책, 재미있었다. 우선 이 책의 힘으로 ‘지도의 날’이 만들어진 것을 알려 드린다. 책 읽은 감동을 공유한 전문가들과 관련 단체, 예술가 시민 등의 열성이 하늘을 찌른 결과다. 겨레가 지도학으로 인류에 기여했음을 확인하는 뜻이다. 6월 23일 강원대에서 열린 대한지리학회에서 관계 전문가들은 매년 9월 첫 토요일을 ‘지도의 날’로 선포했다. 세계의 지도 관련 중요한 책들의 상당수는 이 지도를 표지 그림으로 쓴다. 세계사적 의미를 짐작하자. 지도에서 넓이는 ‘정치’다. 조선이 중국과 비교될 만큼 크다.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보다도 훨씬 크다. 선조들, 눈 들어 중국 땅 힐끔 흘겨보고 인도양과 파로스등대의 지중해, 베네치아 파리 찍고 포르투갈 호카곶과 남서아프리카 오렌지강까지 삽상(颯爽)하게 관조했다. 그 시기, 강리도 작가들은 사대주의(事大主義)를 그렇게 찢어버렸다. 후손들 혹 쩨쩨해질까봐 통찰의 착목(着目) 지점을 멀고 크게 잡은 것이리. 공공(公共)의 용도로 널리 쓰인 지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저자 김선흥 선생은 판단한다. 가슴 뛰는 지도다.
개화기(開化期)에 우리가 만난 민주주의는 서양의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일본이 번역한 정치용어다. 먼저 해외 문물(文物)을 받아들인 그들의 노고의 결과인 것이다. 철학(哲學 philosophy) 과학(科學) 자아(自我 ego) 신문(新聞) 방송(放送) 등 개념어들의 ‘출생’의 내역과도 같다. ‘선거로 뽑은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제도’인 데모크라시는 그렇게 우리의 ‘민주주의’가 됐다. 번역자(일본)는 멋을 좀 부려 민주주의(民主主義) 즉 시민(백성)이 주인인 제도라고 이름 매겼다. 비슷한 말 같지만 뉘앙스(어감)를, 그 차이를 살필 일이다. 우리 마음속 민주주의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데모크라시)에 대한 ‘뒤집어보기’겠다. 일부 신문이 정부발령 인사(人事)를 보며 ‘(모두) 윤심만 살피지 않겠나’고 지적한 것을 보고 ‘윤심민주주의’란 말을 떠올렸다. 정부 여당이 ‘윤심’만 좇는다면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의 실체)는 ‘윤심’이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민주주의나 정의를 세우기 위해 피땀 바친 선각(先覺)들의 그 ‘민주주의’는 앞에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비로소 의미가 되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닌, 절대적인 개
못된 정치 쩨쩨한 속셈이 ‘과학’을 주물럭거리는 꼴, 요즘 국제정치학이다.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과학적으로’ 매만지니 오염수 1리터쯤은 마셔도 별 탈 없단다. 그 과학은 서양문명의 ‘정치’인가? 싹수없는 과학, 그대 드시게. 과학이 무엇에 입맛을 다시나? 말(언어)도 ‘과학적으로’ 마사지했다. ‘처리수’라니 애무(愛撫) 수준일세. ‘안전하다.’는 장본인들의 창작이다. ‘안전하면 자네들이 마시게나.’는 취지 중국 당국의 언급, 간명하고 적절하다. 섬이어도 그들 강산과 들판, 유유(悠悠)하더라. 부사산(富士山) 꼭대기나 상근(箱根) 온천지 호젓한 호수에 담아 오래 마시면 그 ‘안전함’과 책임감에 지구촌이 갈채 보낼 터. 복합오염이란 말은 그런 과학 판치는 서양문명에서 더 오래된 상식이다. ‘안전하다’ 강변하기 위한 의도의 실험이나 검사(檢査)의 실속, 세상이 안다. ‘과학적’ 간판 걸고 ‘눈 가리고 아웅’이면 만사 오케이? 벋서면 수사? 법치주의? 그 과학 말고 ‘진짜 과학’으로 보자.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놈’으로 시작하는 말의 다음은 입을 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다. 패륜(悖倫)이다. 지들도 속으론 그리 생각할 것이다. 중국의 언급 또한 그런 생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