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 있습니까.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이 막힐 때. 발가벗겨진 것 같아 숨고 싶을 때. 당신도 나처럼, 놓아버리고 싶은 적 있습니까. 말짱한 세상이 싫어서 취해버린 적 있습니까. 나처럼 당신도, 엉망진창에 누운 적 있습니까. 아마도 없겠지요. 참 쪼잔합니다. 나라는 사람 말입니다. 빨았다 뱉으면 그만인 한 모금 담배 연기 같달까요. 그렇잖습니까. 담배 연기란 게 형체만 요란하고 쓸모없는 것이라서. 훅 뱉어버리면 그뿐, 그립거나 보고파 할 대상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여운은 남는다고요? 웬걸요. 남아봐야 반지하 단칸셋방에 널린 빨래 같아서, 바람 따라 흘려보내고 싶은걸요. 흘러 흘러 먼바다에 가 닿으면 부끄러움도 그만큼 옅어질 테니까요. 그럴 때 있습니까. 통 크게 쏘고 싶을 때. 가격표 보지 않고 사주고 싶을 때. 당신도 나처럼, 주머니만 뒤적이다 돌아선 적 있습니까. 한 번쯤 서고 싶은데, 한 번은 서야 할 텐데. 사람 노릇이 왜 이리 고달픈지. 달력에 표시된 기념일을 볼 때마다 서지 못하고 넘어지는 내가 어쭙잖아서. 하, 이러고도 사내랄 수 있을까. 이리 생겨 먹어도 어른이랄 수 있을까. 친구고 형제고 가족이랄 수 있을까. 쓴물 삼키는 나처럼 당신도,
새벽이 열리면 산에 오릅니다. 오른 산에는 벌써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들뜬 눈동자들이 한 곳을 바라봅니다. 저물었던 해가 산 너머에서 다시 떠오릅니다. 지고 뜸과 상관없이 해는 같은 해입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라는 믿음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조차 헌것과 새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은 진리보다 쉽게 전염되어서 돌이키기 힘듭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는 믿음, 그 믿음에 전염된 사람들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나 또한 전염된 눈빛을 다독이며 같은 방향으로 향합니다. 산인지, 오름인지, 새로움인지, 태양인지..... 분명치 않은 대상을 향해 사람들은 해묵은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집니다. 벗어 던진 짐들이 바윗덩이가 되어 산비탈을 굴러 내려갑니다. 오르다 오르다, 끝내 굴러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의 바윗돌 같습니다. 어쩌면, 시지프의 바위는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헛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쇠똥구리를 보면서 느낀 부끄러움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굴리는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뒷발로 쇠똥을 굴리는 녀석과 나는 닮았습니다. 녀석과 내가 이르고자 하는 삶의 정상은 몇 덩이의 쇠똥을 굴려야 도달할 수 있을까요. 굴리고 또 굴린다고 정
허망함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다. 죽음 너머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다. 삶에 발 딛고 죽음과 결별하는 마지막 절차가 장례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끼리 죽음의 아픔을 나누는 것처럼 민망한 일이 또 있을까. 고인(故人)의 영정(影幀) 앞에 조아리며 절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휘청거린다. 망자의 얼굴을 쏙 빼닮은 자식을 보고 있자면,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내가 당혹스럽다. 이리도 쉽게 화르르 태워지고 사라지는 것이 한 사람의 역사일 수 있을까. 빈소를 걸어 나올 때면, 그래도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 흔들리는 넥타이 같아서 아찔하다. 진이 빠진다. 길을 잃은 세상에는 내일이 없다.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꽃보다 아름다운 게 사람이라고? 한때, 그렇게 믿었던 내가 안쓰럽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도 사람일 수 있을까.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아서 이 겨울은 내내 불면이다. 귀를 여는 것조차 겁이 난다.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을 조롱하고, 추모를 가장하여 구호품을 싹쓸이하는 그들도 사람이랄 수 있을까. 그것도 모자라 제주항공 참사를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것”이라 말하는 목회자는 또 어떠한가. 그런 목회자를 최고사령관이라 추앙하는 정치
같지 않습니다. 아닌 건 어떻게 해도 아닙니다. 넘나들기 쉽도록 설치한 사거리 신호등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옮겨 가도 무방한 온탕(溫湯)과 냉탕(冷湯)이 아닙니다. 선택 장애 손님을 위한 메뉴, 이를테면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은 더더욱 아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을 수 없습니다. 다름과 틀림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둘로 가르는 ‘낮’과 ‘밤’처럼 별개의 존재입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그릇’으로 좁히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밥그릇도 국그릇도 모두 그릇입니다. 다만 그릇 안에 담는 음식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생김새와 쓰임새가 서로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라는 별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이름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국적과 성별이 다르고, 말투와 성격이 다릅니다. 차이(差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게 차별(差別)입니다. 출신과 학벌과 성(性)과 인종에 대한 차별이 거기에서 싹텄습니다. 다름을 올곧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틀림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해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
누구였더라?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낯설어서 한참 만지작거립니다. 명함이든 무엇이든 주고받았으니 저장되었을 게 분명한데,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서 답답할 밖에요. 죄송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해서, 몇 번을 속으로 불러 보다 삭제 버튼을 누르고 맙니다.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이면 늘 겪는 일입니다. 젊어서는 전화번호를 적은 조그만 수첩을 정리하였는데, 요즈음은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정리합니다. 굵은 볼펜으로 주욱 선을 그어 지우던 시절에서 슬쩍 삭제 버튼을 누르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정리한다’는 본래의 목적에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요즈음 나와 당신이 하는 정리는 방이나 책상을 정돈하는 것이 아닙니다. 쓸거나 털거나 닦아내는 게 아니고, 높낮이를 조절하거나 위치를 바꾸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정리는 묵은 생각을 지우고 고인 시간을 비우는 것입니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서 세상살이에 눌린 어깨를 쉬게 하는 겨울잠 같은 것이랄까요. 묵은 계절을 정리하는 건 사람 아닌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은 계절의 온도에 따라 낯빛을 바꿉니다. 스치고 지날 때 얼굴을 할퀴는 손톱은 겨울바람의 전유물입니다. 봄도 여름도 가을조차도 겨울바람이 뿜어내는 작별의
흐르는 것은 죄다 길이 있다. 흘러야 길이다. 물이 그렇고 숨이 그렇고 피가 그렇다. 바람도, 해와 달도 흐르는 길이 있다. 흐름은 길이 품고 태어난 숙명이다. 형체가 있든 없든, 만져지든 만질 수 없든, 흐르는 것들은 흐르는 것들끼리 길을 따라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길이라고 이름 붙인 게 있었던가. 나는 흐르지 않는 길과 마주친 적이 없다. 길이란 길은 흘러야 산다. 생명도 그와 같아서, 길을 따라 생명의 씨앗을 흘려보낸다. 뿌리를 내린 것들은 뿌리 아래서 물과 양분을 뽑아 올려 줄기와 이파리로 실어 나른다. 손과 코와 입을 가진 것들은 쥐고 맡고 뜯은 것을 씹어 삼켜 허파와 위와 심장과 뇌로 실어 나른다. 그렇게 실어 나른 숨결과 온기가 생명을 살려낸다.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다. 막힌 것도 길일까? 묻는 건 어리석다. 막힘이라는 말 어디에도 흐름은 없다. 막힘이 길어지면 기필코 끊어지고 터진다. 그것이 길이 품은 고유의 성깔이다. 남과 북을 잇던 길도 끊어지고 말았다. 철길도 찻길도 끊어졌다. 땅으로 난 길이 그 지경인데 하늘길과 바닷길은 오죽할까. 꽉 막힌 길을 넘나드는 건 삐라와 오물 풍선뿐이다. 보내고 받는 건 반가움이라야 온당한데,
찾아낸 약(藥)은 생각이다. 오랜 실패 끝에 터득한 처방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덮고, 생각으로 생각을 지운다. 덮고 지우기를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들린다는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아니 망각하고 만다. 들리는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 도망쳐서, 들림에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내게는 그것이 기쁨이다. 들리지 않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선 쉬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생각을 멈추면 기쁨도 따라서 멈추고 만다. 기쁨이 멈춘 자리에 남는 건 소리다. 풀벌레 울음 같은 그 소리. “찌르르르.” 헤아려 보니 벌써 이년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귀울림(耳鳴)에 시달리고 있는 게. 귀를 막으면 도리어 또렷해진다. 없는 소리를 있는 것처럼 지어내서 들려주는 녀석의 정체는 뇌(腦)다. 왜 그러는지 첨단 의료 장비도 알지 못한다. 없는 소리 때문에 하루가 기울어설까. 언제부턴가 어지럼증까지 도졌다. 귀울림과 어지럼증이 합세하는 날이면 하루가 지옥 같다. 간신히 살아낸다는 표현이 적확하리라. 간신히 길을 걷고, 간신히 글을 썼다. 이러다 영영 뛰지 못하는 건 아닌가. 조기축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운동장을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걷지만 우리는 어제의 우리가 아닙니다. 어제 걸었던 산책로를 오늘 다시 걷습니다. 길은 산과 도시의 경계를 가르며 구부정하게 누웠습니다. 누운 길의 꼬리를 밟으며 머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무리 걸어도 길은 쉬 머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발은 길에 있지만 눈은 도시에 머뭅니다. 철야에 지친 간호사처럼 도시는 식곤증에 취했습니다. 그림자를 늘어뜨린 빌딩 숲이 어깨를 움츠립니다. 조각공원에 늘어선 조각상들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것 같습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흐르지만 시간은 어제의 시간이 아닙니다. 어제 걸었던 골목길을 오늘 다시 걷습니다. 골목은 집과 집 사이를 서성거리는 길 잃은 아이 같습니다. 도시의 골목에는 한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습니다. 열기가 빠져나갈 틈이 도시의 밑바닥에는 없습니다. 며칠째 계속되는 열대야로 도시의 밑바닥은 절절 끓습니다. 반지하 단칸 셋방 창문들이 발밑에서 나란합니다. 하늘을 향해 열려야 할 창문들이 골목에 갇혀 굳게 닫혔습니다. 에어콘 실외기에 매달린 호스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툭하면 코피를 흘리던 녀석이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녀석은 밥보다 약을 자주 먹었다. 밥보다 약을 사랑한 까닭으로 녀석은 작고 말랐었다. 글쎄, 그림자보다 가느다란 소녀가 있었다면 믿어주실런가. 그런 녀석이 애지중지하던 건 청바지였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상관없이 녀석은 늘 청바지를 입고 살았다. 청바지만큼이나 도드라지는 특징은 단발머리와 까무잡잡한 얼굴이었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았지만, 녀석의 얼굴에 햇살이 드리우기라도 하는 날이면, 가지런한 치아에서 묻어나오는 하얀 미소가 어찌나 예쁜지 숨이 막혔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그러니까 작고 깡마른 단발머리 소녀는 언제부턴가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눈엣가시는 보지 않아도 거슬리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눈엣가시다. 마음만 먹으면, 군인이 제 손으로 계급장을 뜯어내고 대통령이 되던 시절이었다. 미쳐 돌아가는 시절이다 보니, 학생 또한 강의실보다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더러는 강의실을 찾은 학생에게 “정신이 있는 자들인가.” 호통치며 거리로 내쫓던 교수도 있었다. 지지리 복도 없는 나는 그런 교수의 수업은 들어 보지도 못하고, 학점만 선동열 방어율(0.75)에 육박했다. 경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할머니와 살았다. 할머니와 살았던 어린 시절은 그의 가슴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나이테로 꼭꼭 새겨진 할머니는 그가 대학 다닐 때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육 개월을 그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돌아가실 무렵,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죽고 싶지 않다고 읊조렸다. 그때, 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까. “제가 꼭 옆에 있을게요” 말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안아드리기만 했을까. 아직도 그는 그게 늘 안타깝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깜깜한 밤하늘을 촛불이라도 태워 밝혀드릴 수 있을 텐데. 후회는 늘 늦고 더딘 것이라서, 할머니의 영원한 떠남을 그는 쉬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실의 아픔은 할머니 장례를 치른 뒤에 밀어닥쳤다. 스무 살 청춘이 감내하기엔 깊은 상처였다. 휴학하고 군대에 갔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훈련에 지친 이등병의 가슴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골 깊은 나이테가 새롭게 각인되었다. 그러다 문득 떠 오른 게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 그 시절, 할머니는 그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일하러 나갔다. 할머니 일터는 건설 현장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