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된 영화 ‘화란’의 화란은 네덜란드의 한자어이다. 주인공 연규(홍사빈)는 야구 방망이로 폭력을 일삼는 계부(유성주)때문에 숨 막히는 가정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연규 집은 가난하다. 엄마는 치킨 집에서 일한다. 동네가 다 그렇다. 연규는 동네 깡패 치건(송중기)에게 거기(화란)는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산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연규는 영화 내내 네덜란드에 가지 못한다. 네덜란드 얘기는 영화 속에서 그렇게, 딱 한 번 나온다. 그러니까 영화 ‘화란’은 네덜란드와 사실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건 영화 ‘암스테르담’이 사실은 암스테르담과 상관이 없는 것과 똑같다. ‘화란’은 액션 누아르이다. 손톱을 펜치로 뽑고 못을 뭉쳐서 얼굴을 후갈기는 등등 폭력이 난무하는 편이다. 동네 깡패들과 지역 정치권이 야합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서 좋은 장면은 액션이 아니라 두 개의 대화 장면이다. 치건이 연규에게 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연규의 온몸엔 학교 애들에게 맞은 구타 자국이 있고 그의 왼쪽 눈 옆은 아버지한테 맞아 죽 찢어진 상태다. 연규는 18살이지만 그의 삶은
영화의 화두는 시대에 따라 옮겨 다닌다. 한때는 정치적 난민 문제가 대세였다. 시리아 독재와 내전이 유발한 난민이 어떤 국제 분쟁으로 이어졌고, 자국 내 이민자 문제의 정치 쟁점화로 연결됐으며, 그로 인해 트럼프 식의 극우 정치집단들을 양산해 내는지를 다뤘다. 그러다가 또 언제부터인가 많은 관심이 환경 문제로 옮겨 갔다. 모두들 엘 고어 식 ‘불편한 진실’에 대해 얘기했다. 요즘의 메인 테마는 AI이다. AI 시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를 다룬다. AI라는 초유의 인공지능 기술이 신 제국주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AI 기술이 앞으로 그야말로 인간 해방에 일조하는 장미 빛 미래가 될 것인지에 대해 분석하고, 걱정하고, 공감한다. 영국 가렛 에드워즈 감독의 ‘뛰어난 지능’이 돋보이는 영화 ‘크리에이터, The Creator’는 AI 얘기를 다룬 것 중 가장 혁신적이면서, 또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몇 가지 지점에서 깜짝 놀라게 되는데 1) 배경은 2066년이지만 실제 얘기는 1960년대의 베트남전이라는 것 2) 여기에 9.11 테러의 역사를 얹히되 부시-럼스펠드-딕 체니가 공모한 공작 정치의 이슈였던
다큐멘터리는 역설적으로 脫다큐적일 때, 다큐처럼 보이지 않을 때 생명의 리듬을 얻는다. 재미와 흥미가 배가된다. 물론 잘 만들었을 때에 한한다. 구성이 돋보이고 주제의식의 심층에 보편타당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무엇을 매달아 놓을 때이다. 요즘의 다큐는 드라마 타이즈 형식으로 전체를 구성하고 역사적 팩트에 대한 해석에 있어 주관적 시선을 강하게 개입시킴으로써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극영화에 가까운 작품일수록 청년 세대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른바 비정통 다큐멘터리의 정통화인데 최근 개봉된 ‘킴스 비디오’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폭발적 재미를 준다. 동시에 세대 간 단절의 시대에 다리를 놓는다. 밀레니엄 이전과 이후를 이어 간다. 현재의 대중 상업영화가 1970~1990년대의 하위문화, 전위적인 것들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킴스 비디오’는 보기 드문 다큐이다. ‘킴스 비디오’는 우리 말로 하면 김씨네 비디오 가게이다. 미국 뉴욕 맨하탄 이스트 빌리지에 있던 비디오 점이다. 세인트 막스 플레이스(Saint Mark’s Place)에 있었으며 지번으로는 8번가로 세컨드 애버뉴(2nd avenue)와 서드 애버뉴(3rd avenue) 사이이다
이 불우한 시기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980년대 일본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모리타 요시미츠의 영화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과 같은 것이다.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 회고전은 지난 15일부터 열리고 있고 향후 24일까지 계속된다. 16일에 상영된 '하루'는 그의 1996년작으로 비교적 초중기작에 속하고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1998년에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영화로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와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가 있다. 두 영화는 일본영화가 개방된 후 앞서거니 뒷서거니 들어 왔다. 국내 개봉 1호가 된 일본영화는 ‘하나비’였다. 모리타 요시미츠의 영화는 이상하게도 한국에서의 개봉이라는 ‘수혜’를 입지 못했는데 ‘하루’ 직후에 내놓은 ‘실락원’이 국내에서 개봉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 화근이 됐다. 표현 수위가 국민들이 보기에 적절치 않다는, 그야 말로 후진국적 ‘영화 심의’ 탓이었는데 당시 한국은 18세 이상 관람가의 일본영화는 2004년 이전까지 여전히 개봉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실락원’이 뭐 그리 대단한 수위의 작품도 아니었다. 흔한 정사 씬이나 베드 씬도 이렇다 하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불륜 남녀의 러
강제규의 신작 ‘1947 보스톤’은 잘 숙성된 작품이다. 코로나 3년을 기다렸다. 영화는 보통 사과 같은 과일과 같아서 창고에 오래 두면 부패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1947 보스톤’은 먹기 좋을 만큼 잘 익은 영화가 됐다. 출하시기가 나쁘지 않았던 덕이다. 의외로 시대 상황과 잘 맞는다. 맞춤형 양복처럼 완성도도 좋다. 너무 요란하지도, 너무 투박하지도 않게끔 재단됐다. 테일러의 재봉질 솜씨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단골손님들을 만족시킨다. ‘1947 보스톤’은 1947년 보스턴 국제 마라톤에 출전한 한국 선수 서윤복의 이야기이자 그를 훈련시킨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의 이야기이다. 손기정은 다 알다시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뛸 수 밖에 없었던 금메달리스트였다. 이때 남승룡은 동메달을 땄다. 손기정이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사건, 동아일보의 한 기자가 그렇게 ‘주도한’ 보도사진이 문제가 돼 이후 그는 영영 마라톤을 뛰지 못했다. 1936년은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일 제국주의의 군부는 눈이 미쳐서 돌아갔을 정도로 식민 통치를 강화했을 때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라는 독립이 됐다. 손기정은
일본에서 가장 잘 우는 여배우는 안도 사쿠라이다. 그녀는 감정만 살짝 잡아도 눈물을 줄줄 흘리는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영화 ‘한 남자’에서도 첫 장면부터 안도 사쿠라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영화 ‘한 남자’는 그렇게 시작한다. 일본의 미야자키(큐슈 내의 지역으로 일본 본토인 혼슈에서 꽤 떨어진 곳이다. 오키나와 다음으로 일본 최남단 지역으로 꼽힌다)에서 세이 분도(誠文堂) 문구점이라는 조그만 가게를 하며 살아가는 타케모토 리에(안도 사쿠라)는 비가 오는 날 가게에서 눈물을 흘리며 홀로 울고 있다가 한 남자 손님을 맞는다. 나중에 타니구치 다이스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이 남자(쿠보다 미사타카)는 훗날 리에의 일생을 송두리째 흔들게 된다. 리에는 유토란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다. 유토 밑으로 료란 이름의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나 2살 때 뇌종양으로 죽었다. 둘째가 죽는 과정에서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는 죽은 아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허전하다. 그래서 종종 혼자 운다. 슬픔에 젖어 사는 리에의 빈 공간을 약간은 과거가 수상해 보이는 남자 다이스케가 스며 들어온다. 그는 주변 벌목 회사에 일하는 노동자이다. 벌목꾼이다.
예상 밖 흥행 안타를 치며 여름 영화시장을 간신히 연장전으로 끌고 가고 있는 ‘달짝지근해: 7510’의 콘셉트는 의도된 시대착오성이다. 일단 7510이란 것도 주인공 남녀 이름의 발음에서 따왔다는데 이것조차 일부러 시대착오적인 척 구는 것이다. 주인공 캐릭터는 더할 나위가 없다. 차치호(유해진)는 방안에 수십 개의 자명종을 놓고 살아가는데 1시간 단위로 일정을 기억하고 소화하는 성격이어서 시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도 전자시계 카시오이다. 몰고 다니는 차 역시 단종됐어도 한참 전에 없어진 모 회사 브랜드 프라이드이다. 차치호는 과자 회사에서 과자 맛을 내는 연구원이며 집에서는 히키코모리, 회사에서는 ‘왕따’인 인생으로 살아간다. 차치호와 관련된 모든 것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대략 설명되며 영화는 보통 초반에 이야기에 나올 캐릭터를 설명하면서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관객들에게 사전에 브리핑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 만들기의 제1 법칙이기도 하다. 이 영화 ‘달짝지근해: 7510’은 초반부만 보면 영화가 1970, 80년대 배경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공간도 약간은 ‘달동네스러운’ 곳이되 운치가 있으며 다소 서민적이지만 그렇다고 궁색
일본 영화계의 이단아 급 감독인 미이케 다카시의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사무라이 검객 영화이다. 한때 최고의 배우였던 기무라 다쿠야가 주연이다. 칸영화제가 공식 초청한 작품이었다. 칸 영화라고 해서 다 좋은 작품이거나 예술적인 무엇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칸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상한 착시이다. 칸도 수백 편의 영화를 담아내야 할 컨텐츠 용기(容器)에 불과할 때가 있다. 게다가 감독 이름값이 높으면 무조건 선점부터 하려고 하는 나쁜 습성도 있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무조건 낙점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대체로 B급 영화들까지 칸에 가게 된다. 그리고 칸에 간 작품들은 언제부턴가 거의 전부가 부산국제영화제에 걸린다. 그때도 똑같은 논법이 적용된다. 부산에서 유명 감독의 영화가 상영됐다 해서 다 좋은 작품만이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영화가 칸과 부산을 거쳤으면서도 국내에는 수입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국내 미개봉작이었던 탓에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오면서 신작 느낌을 준다.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2017년 작이다. 주인공 만지(기무라 다쿠야)는 죽지 않는 불사신의 몸을 지녔다. 800년을 넘게 살아온 마녀 할멈이 그의 몸 안에 혈선충이라는 벌
지난 5월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던 유재연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 ‘잠’은 여러모로 산뜻한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80만 명, 곧 제작비가 48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름 영화 시장에서 최대 650만 명을 모아야 ‘본전’을 맞추는 큰 영화들에 비하면 일단 마음을 편하게 한다. 게다가 영화의 완성도, 작품성까지 좋다. 이래저래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가뜩이나 한국 영화에 대한 위기설, 중병설이 크고 넓게 퍼져 있는 상황이다. 너무 돈을 많이 들이는 것에 비해 관객들이 적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지닌 본래적 기능들, 세상에 대한 독특한 해석,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무엇의 가치를 구현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잠’은 신선한 데뷔작이자 의외의 구원자 같은 느낌마저 준다. 한국 영화가 현재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침 같은 것을 준다. 영화는 역시 돈과 물질이 아니라 정신과 아이디어, 의지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잠’은 일종의 혼합 장르, 융합의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은 심리 스릴러이다. 중간쯤에는 전형적인 공포영화였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오컬트 영화(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 현상
김성훈 김독, 하정우·주지훈 주연의 영화 ‘비공식 작전’은 흥행 면에서는 치고 나가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첫 주 100만 안팎) 예상외로 활기찬 작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이유는 1) 대체로 텍스트가 이해하기 쉽고 2) 1980년대 후반의 시대 묘사가 섬세하다는 점 3) 레바논 내전 당시 벌어졌던 실제 사건(도재승 서기관 납치 사건)을 드라마틱 하게 구성했다는 점 등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이 내심 이 영화에 크게 동화되고 있는 건, 1980년대 전두환 – 노태우 독재 시대 때 벌어졌던 국가적 사건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 방식 등등이 2023년 현재의 정부 모습보다 훨씬 더, 백배 더 낫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 기이한 역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만약 지금 누군가, 재외국민이든 국내 해외여행객이든 납치나 재난을 당했을 때 현재의 국가나, 공무원 중 누군 가가, 영화처럼 구하러 나설 것인가. 과연 그럴 것인가. 영화는 종종 과거 일을 통해 현실을 일깨우게 한다. 기이한 깨달음을 준다. ‘비공식 작전’이란 영화 한 편이 지금 세상을, 전두환 시대 때보다 못한 현실로 깨닫게 할 줄은 이 작품의 감독이나 배우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