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무한한 접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 그 시간이 없는 한 점에서, 인간의 진정한 생활이 영위되고 있다. “시간은 흘러간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본래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탈무드) 시간은 우리 뒤에 있거나 우리 앞에 있지,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나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육체에는 모든 것에 차별이 없다. 물질에는 뭔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에는 영혼에서 나온 것 외에는 역시 차별이 없다. 영적인 생명은 자주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은 과거와도 미래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모든 중요성은 오직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간은 가장 큰 환상이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존재, 우리의 생활을 분해하는 프리즘이며, 우리가 초시간적인 것, 이념의 세계의 것을 탐구하기 위한 형식이다. 공은 전체로서 존재하고 우리의 눈은 한 번에 그 전체를 다 볼 수 없다. 둘 중의 하나, 공이 눈앞에서 구르거나, 우리가 공 주위를 한 바퀴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이며 평등하다는 의식은 인류에게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예수께서 이 말을 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을 통합하여 국경을 초월한 형제자매로 만드는 것, 그들을 신과 합일하게 하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영원한 생명인 사랑의 계율 아래 그들을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라므네)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상대를 거의 동물로 보는 한 그들은 사람들을 동물처럼 다루는 것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고, 폭력 또는 계책을 이용해 인간을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이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가치를 깨닫지 않는 한 새로운 관계는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채닝)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도 너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는 있다. (키케로) 도덕을 얘기하면서 너희의 의무를 너희 가족과 조국의 범위 안에 한정하는 사람들은, 그 범위의 크기와 상관없이 너희에게도 타인에게도 해로운 자기애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조국은
진정한 자선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칭찬과 내세에서의 보상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한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어버이로부터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늘 어버이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예수) 가난한 과부가 희사한 한 푼은 부자의 만금과 맞먹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자비이다. 오직 가난한 자, 스스로 수고하여 일하는 자만이 자선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부유한 자와 게으른 자에게는 그 기쁨이 없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자선행위를 하는 것은, 좋게 말해 예의지 결코 자선이 아니다. 누군가가 너에게 길을 물으면, 너는 예의 바르게 걸음을 멈추고 가르쳐주어야 한다. 또 만약 누군가가 너에게 만원이나 5만 원을 빌려달라고 할 때, 네 수중에 그만한 여유가 있다면 빌려주어야 하지만, 만약 빌려주었다 해도 그것은 자선과는 거리가 멀다. 물질적으로 돕는 것은 희생이 동반되어야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물질적 도움을 받은 사람은 정신적 도움을 받은 것이다. 오늘 세
학문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유익함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말하고 있다. 종교적인 미신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학문적 미신이라는 것도 있다. 정신 학문은, 모든 오락과 유희, 드라이브, 산책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무의 실천을 방해하지 않는 한 허용이 된다.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오락에만 빠지면 안 되듯이 참된 인류의 정신적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학문에 종사하는 것도 도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이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에 더욱 필요한, 더욱 높은 인식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다. 뜻도 맨 처음부터 있는 뜻이요, 삶은 나중 끝까지 있는 삶이다. 처음도 나중도 밑도 끝도 없는 말씀을 하는 수 없이 그 한마디를 잡아 쳐든 것이 글이라는 것이요, 그 글을 이리 엮고 저리 짜놓은 것이 책이라는 것이다. 커도 말 끄트머리, 작아도 말 끄트머리, 바로 놓아도 말 끄트머리, 뒤집어놓아도 말 끄트머리다. 네가 처음 속에 나중을 보며, 나중 속에 처음을 보고, 껍데기 속에 속을 읽으며, 속 속에 껍데기를 읽는다면, 알지 못해도 안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 평가하면 할수록 그가 선 자리는 불안해지고, 반대로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가 선 자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강해지려면 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 물은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흐르고, 둑이 있으면 멈춘다. 그러다 둑이 터지면 다시 흐른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된다. 그처럼 부드럽고 막힘이 없는 유연함으로 인해 물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강한 것이 된다. (노자) 물이 높은 곳에 머물지 않고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듯, 선덕 또한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머물지 않고 오직 겸허한 사람에게만 머문다. (탈무드) 사람은 내면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하찮은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예지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겸허해지자. 그러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채닝) 어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이를 행할 힘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거나 잘못된 비판에 대해 한탄하지 않는다. (중국 금언) 선량하고 총명한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자신은 아는 것이 조금밖에 없으며 자신보다 훨씬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남을 가르치기보다 남에게서
유년시절부터 정신의 발달과 육체의 쇠퇴가 시작된다. 그건 바로 두 개의 원뿔체를 서로 반대로 세워놓은 것과 같은 것으로, 육체적 힘의 쇠퇴와 정신력의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화로운 성장은 자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속에서도 침묵과 고요속에서 이루어진다. 떠들썩한 것은 모두 파괴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야만적이다. 그러나 아직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진정한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정적과 침묵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뇌 속에서 허덕이며 가끔 고독해지면 쓸쓸해질 뿐이다. 인간은 오직 고독과 정적 속에서만 힘찬 생명력과 성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도 그것을 “네가 기도할 때는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말로 표현했다. 세계는 평화의 실현을 위해 이 침묵 속의 성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을 한 온갖 새로운 가르침이 수많은 목소리가 되어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의 진정한 정신적 성장이 방해를 받고 있다 우리는 더욱더 침묵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침묵의 목소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려줄 것이다. (류시 말로리) 정신적 생활을 하는
진정한 예지는 인생에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아는 것이다. 학식과 예지는 좀처럼 양립하지 않는다. 학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은 쓸모없고 의심스러운 것이다. 진정한 현자는 그렇게 많은 것은 모르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필요한 것이며, 또 그가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확실한 것이다. 진정한 예지에 의해 주어진 행복은, 다른 모든 지식에 비해, 마치 사막에서 한 잔의 물과 같이 한 자루의 황금보다 귀하다. 이 시대는 장차 올 생명의 역사에 대한 준비의 시대이다. 혼돈한 가운데서 질서가 나오고, 영원한 암흑과 침묵이 깨어서 광명과 음악이 나오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이 하늘과 이 땅이 되어 나오기 전에 얼마나 많은 천체의 출몰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원소의 모이고 헤어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거룩한 이 극의 무대가 될 지구가 그 얼굴을 나타낸 후에도 생물이 생존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몇억 년의 세월이 지났고, 마지막에 연출자 저 자신이 등장하기까지에는 또다시 몇 억년이 흘렀는지를 알 수 없다. 이 시대는 도리어 그 때문에 오는 역사의 의미의 위대를 미리 표하는 시대다. 정직작업에 많은
우리 인간만이 이 세상에 정의를 이룰 수 있다. 자연의 모든 힘도 우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의식적 존재의 집합체인 인류가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할 자가 없다. (히지츠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들은 생존경쟁을 위해 온 힘을 다 쏟고 있어서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단순히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회개혁자의 과제가 매우 어렵고 그 진로가 험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위대한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맨 처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상류계층의 조소와 일반서민의 저주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이며, 사람들에게 박해받고 고통받으며, 수난의 옷을 입고 가시관을 써야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헨리 조지) 이 세상의 삶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에 대한 우리의 참여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그러한 사소한 노력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향한 모든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아도, 적당히 넘기지 말고 진지하게 고삐를 잡아당겨라.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인간은 그 의식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고독하다. 그 고독은 때로는 이상하고 낯설며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생각이 부족한 사람은 여러 가지 기분전환을 시도하며, 괴로운 고독의 의식에서 도피하고자 의식의 높은 곳에서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만다. 이에 반해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그 높은 곳에 계속 머물러 있다. 개체는 유한하다. 그러므로 신은 결코 개체일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도는 신에 대한 호소이다. 개체가 아닌 것에 어떻게 호소한단 말인가? 천문학자들은 정말로 움직이는 것은 그들의 시야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별자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천문대와 망원경을 설치한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역시 지구의 움직임이 아니라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도도 바로 그것과 같다. 신은 개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개체이기 때문에, 자신과 신의 관계를 신이 개체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개체와의 관계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개체를 인격체로 이해하는게 더 옳을 것 같다. 옮긴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 우리의 시대가 오늘날 사로잡혀 있는 이기주의와 회의와 부정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진정한 행복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물체의 그림자처럼 선한 생활에 항상 따르기 마련이다. 신은 우리를 더욱 선하게, 더욱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의 눈앞에 또는 우리 가까이에 갖다 두었다. (세네카) 자신의 생명을 정신적 자기완성 속에 두는 사람은 불만을 느끼는 일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 진정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활동은, 언제나 쾌락의 획득을, 고뇌의 회피를,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의 도피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타인과의 투쟁에 박차를 가하고, 고뇌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며 죽음을 끌어당긴다. 그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그들이 알고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더욱더 많은 쾌락을 좇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에는 한계가 있어, 그 한계를 넘으면 쾌락도 고뇌로 바뀌고 더욱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바뀌어버린다. 진정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뇌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이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가질 수 없는, 남으로부터 힘으로 빼앗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쾌락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남으로부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힘으로 빼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