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존재도 자기 자신에게만 얽매여 있으면 악마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된다. 도덕의 세계에는 주인 없는 땅이 없으며 애매한 땅은 모두 악마에게 속해 있다. (아미엘) 네가 세속적인 통념과 세속적인 관심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너는 세상 사람들의 동의와 칭찬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끝없이 사람들의 눈치만 보다가는 아무것도 결단할 수 없다. 사람들의 평가는 무한하고 다양하다. 너는 말할 것이다. “나는 훌륭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그러나 네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이제부터 하려는 행위를 칭찬해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내면 생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과 다른 남들의 생각 속에 사는 가공의 자신을 추구하며, 억지로 자신을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가공의 자신을 장식하는데 정신을 쏟느라, 실제의 자신은 소홀히 한다. 만약 우리가 평정과 성실과 관대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서둘러 그것을 과시하며 그 미덕을 가공의 자신에게 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한 미덕을 가공의 자신에게 줄 수 있다면, 진정한 자신은 그것을 잃어도 좋다
나의 삶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어떠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사명을 두고 있는 사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아직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 참으로 선량한 사람들의 겸양은 무의식 중에 나타난다. 그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이미 한 일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중국 속담) 까치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스스로 과시하는 사람은 스스로 빛날 수 없다.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은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좋은 일은
일정한 한계를 넘는 자기애(自己愛)는 마음의 병이다. 그것이 극한에 다다르면 이른바 과대망상이라고 하는 정신적 질환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부정이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타락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의 욕심과 번뇌야말로 가장 잔인한 폭군이다. 그것에 굴복하는 날, 우리는 그 비참한 노예가 되어 호흡마저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오직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그러한 노예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다. (페늘롱)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보기 드물다. 사사로운 욕심이야말로 자기기만, 자기변호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다. 진리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경우, 사람들은 진리에 두려움을 느낀다. 처세 철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형편에 따라 인생에 적용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사로운 욕심에서 오는 편견이 이 이기주의의 수법에서 나오는 모든 그릇된 생각을 합리화한다. 인류가 바라는 유일한 진보는 향락의 증대이다. 자기
고통의 감각이 육체의 보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인 것처럼, 마음의 고뇌는 우리 영혼의 보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만약 대기의 압력이 없다면 우리의 몸이 파열하는 것처럼, 인생에 빈곤과 가혹한 노동, 그 밖의 여러 가지 불행한 운명이 찾아드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의 오만은 계속 기승을 부리다가 비록 파열하는 위험에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급기야 비할 데 없는 어리석음과 광기의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 고뇌는 활동에 대한 박차(拍車)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활동 속에서 생명을 느낀다. (칸트) 지상의 삶에서 갖가지 불행을 겪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를 신성한 정신적 고독 속으로 이끌어, 자신이 고향에서 쫓겨난, 어떠한 지상적 기쁨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행위의 동기는 순수하고 행위 자체도 올바른데, 여기저기서 그를 반박하고 비난하거나 나쁘게 생각하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 일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허망한 명예에 대한 해독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당하고
정신생활에 있어서의 일의 중요성은 그 물질적 의미나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되며, 그 선의에 의한 노력의 정도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자 할 때,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정화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극히 평범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에 만족하는 대신, 뭔가 매우 어렵고 놀라운 일을 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실은 전자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페늘롱) 자신이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일을 사소한 일이라 하며 하지 않는 사람은 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알고 보면 그것이 그에게 너무 작은 일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큰일이기 때문이다. (표치) 너는 일을 완성시킬 의무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회피해서도 안 된다. 너에게 일을 맡긴 신은 너의 일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 자신은 하늘이 맡긴 일을, 즉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이다. (중국 지혜) 사람은 사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천에 의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노력 속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괴테) 자신의 ‘자아’를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가치도 인식한다. 황제가 성자에게 물었다. “너는 나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느냐?” 성자가 대답했다. “예, 있습니다. 신을 잊고 있을 때.” 이웃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과 똑같이 느낄 때, 우리는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주세페 마치니) 장애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아미엘)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거나 바보라거나 더러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한번 경멸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타인에 대한 경멸의 감정에 제동을 걸 수 없게 된다. 인간 그대여, 자신의 가치를 알라. 지금은 그럴 때이다. 우리는 전혀 잘못 태어난 존재가 아닌데, 달아나 겁을 먹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다. 의연하게 고개를 들어라. 나의 생명은 장식물이 아니다. 그것을 살리라고 주어진 것이다. 나는 어디서든 진실을, 완전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주창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나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에머슨) 개인의 자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개인의 자유, 오직 개인의 자유 위에서만 민중
인류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쉬지 않고, 사랑에 의한 합일에 바탕을 둔 신의 나라의 건설에 다가가고 있다. 개개인이든 인류 전체이든, 결코 현재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성장의 가능성은 바로 신에게 있고 무한한 것이므로), 끊임없이 껍질을 벗고 변화하면서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옮겨가야 한다. 모든 상태는 그것에 앞서 있었던 상태의 결과이다. 그 성장은 씨앗이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쉬지 않고 계속되는데, 어느 누구도 그 끊임없이 생성 발전하는 인과율의 사슬을 끊을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개인이나 전 인류가 운명적으로 탈피와 변신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 변신은 역경과 고뇌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위대성을 몸에 걸치기 전에, 빛을 향하기 전에, 어둠 속을 걸으며 박해를 견디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육체를 내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 강하고 더욱 완전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예수가 말씀을 통해, 또 자신의 실천을 통해 가르쳐준 것이다. 이리하여 18세기가 지난 오늘날, 하나의 발전 단계를 끝낸 인류는 다시 서둘러 변신을 모색
폭풍이 물결을 일으켜 물의 투명함을 잃게 하듯이, 정욕과 불안, 동요, 공포는 마음을 어지럽혀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의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롭고 언제나 만족한다, 빈약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불만이요 언제나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외면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만 괴로워하거나 불안과 동요를 느낀다. 그럴 때, 그들은 불안한 듯 자문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하고, 자신들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을 늘 염려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직접 책임이 있는 일과 씨름하며, 자신의 생명은 자기완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처럼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만일 그가 자신이 진리를 지켜낼 수 있을지, 허위를 벗어날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걱정하지 말라. 네 걱정의 씨앗은 바로 네 손안에 있다.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매일 성찰하며 자신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는 그것을 교
만약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본이 같지 않다면, 우리가 늘 경험하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군가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면, 예를 들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화를 내고 있는 사람에게, “하지만 저 사람도 불행한 사람 아닌가!” 하고 말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빗물이 불을 끄듯, 곧 동정은 분노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사람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면, 자신이 이미 그 고통을 상대방에게 주었고, 실제로 상대방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민하거나 어려움과 결핍을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나머지 일은 어떻게 되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쇼펜하우어) 남을 욕하며 그와 다투고 있을 때, 너는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것을 잊고 있으며,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대신 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너는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왜냐하면 네가 맨 처음 신이 창조한 선량하고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라, 몰래 다가가서 먹이를 덮쳐 물어 죽이는 야수로 변한다면, 너는 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지갑을 잃으
미망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상태이다. 하지만 일정한 시대, 일정한 사회 계층 사람들 사이에 특히 그것이 널리 퍼져 있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 집단이 바로 그러하다. 고차원의 인생의 법칙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든, 학문을 배운 사람이 저지른 죄가 가장 무섭다. 무지하고 타락한 민중은 방자한 학자보다 낫다. 전자는 눈이 멀어 길을 잃지만, 후자는 눈이 멀쩡하면서도 우물에 빠지기 때문이다.’(사다) 사람들은 영혼을 잃어버렸다. 그 뒤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다시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 영혼의 상실이 바로 우리의 환부, 현대의 모든 현상에 무서운 죽음을 선고하고 있는, 전 세계에 걸친 사회적 부패의 근원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종교도 없고 신도 없다. 인간은 영혼을 잃어버리고 헛되이 치료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잠시 병세가 수그러든 것처럼 보이는 전염병은 곧 다시 더욱 맹렬하고 더욱 무섭게 기승을 부릴 것이다. (칼라일) 모든 범죄와 온갖 종류의 무서운 기사로 가득 찬 언론은 고기를 중심으로 한 아침 식사의 반찬과도 같은 것이다. 몸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