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방송을 중심으로 불붙은 ‘트로트’ 신드롬이 실로 대단한 광풍이군요. TV조선이 시작한 트로트 경연 열풍에 거의 모든 방송사가 영향을 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발라드·재즈·록 등은 물론 아이돌 출신들까지 오디션 프로그램에 앞다투어 몰려드는 풍경이 일상이 됐네요. 배우들이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일도 귀한 일이 아닙니다. 트로트 경연에 나온 유명 발라드 가수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가슴을 짠하게 만들더군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 장르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어쨌든 도전하는 모습은 참 대단합니다. 평생을 걸고 해온 음악을 버리고 트로트에 뛰어드는 행태에 대한 일부의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은 장르마다 특징이 있고, 독특한 매력도 따로 있긴 하지요. 그 가치를 지키는 일도 소중하지만, 다양한 도전을 끝내 비난할 이유..
세계 질서와 안보가 미·중 패권 구도로 긴박하게 빠져들고 있다. 지난주 미국에서 만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강력한 대중국 공조를 천명하면서 미중 사이의 대치 전선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미·일은 특히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에서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권장한다”고 밝혔다. 중국에게 가장 예민한 대만 문제를 50여년만에 두 정상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일본으로서는 1972년 중국과 국교정상화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한국처럼 대중국 교역 비중이 큰 일본이지만 미국의 대중국 포위 전략을 향해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도쿄올림픽에 대한 지지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방위를 재확인하는 반대 급부를 얻어냈다. 이를 놓고 일본 내부에서 우려와 함께 여러 시각들이 교차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번 미·일정상회담을 계기로 동북아와 동중국해 등 역내에서 일본의 역할 확대와 함께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두 나라는 공동성명에서 “일본은 동맹 및 지역의 안전보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방위력을 한층 강화하기로 결의했다”고 명시했다. 지난 3월 미일 외교·국방 장관(2+2) 회담에서 밝힌 ‘동맹 강화를 위해 능력의 향상을 결의했다’에서 수위가 올라갔다. 일본 언론 조차도 이례적으로 평가하는 이같은 선언은 패권을 유지해야 하는 미국의 이익과 맞아떨어진 결과다. 당장 아사히(朝日) 등 일본 언론들은 “현 단계에서부터 미군과 자위대 사이에서 대만해협 유사 사태를 가정하고 실천적인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들이 대두되고 있다는 식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또 대만을 둘러싼 물리적 충돌이 현실화될 경우 미군을 후방지원하는 '중요영향사태'나 집단자위권을 한정적으로 사용하는 '존립위기사태'를 검토중이라는 기사까지 내보내고 있다. 일본의 역대 정권은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1% 안팎으로 억제하고 있지만 이번 미·일 공동성명에 따른 방위력 증강 소요로 2%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미·일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반도체, 5G(6G), 양자컴퓨터 투자 등 산업 분야에도 의기투합했다. 앞으로 식량, 에너지를 포함한 어떤 부문이 미중 싸움에 휘말릴지 알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미국이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현실을 보라. 국제질서가 구한말이나 냉전처럼 중간지대가 사라지고 있다. 북핵 문제에다 일본 군사력 증강까지 이어지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달 바이든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 우리 입장에서는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필두로 경제협력, 백신 확보 등에서 미국의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 반면에 미국은 대중포위 전선에 한국의 합류를 강력히 요청할 것이다. 어렵지만 국익과 한미동맹을 살리는 교집합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한미정상회담 결과가 초래할 파장까지 모든 부문에서 사전에 우리의 내부를 점검해야 한다.
지난 2018년 9월 19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시민 15만명 앞에서 행한 그 연설을 지켜보면서, 이제 남북의 실질적 평화시대, 나아가 남북연합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 조였던 기억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분단 70여년의 역사가운데 그 날처럼 한반도 평화의 꿈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실감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이 문재인정권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해 김정은위원장 신년사와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 이 후 특사파견에 따른 북미정상 만남의 주선과 4·27 판문점 남북정상의 만남에 이은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실현, 결과물인 합의문에서 북이 그간 그렇게도 바라왔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새로운 북미관계수립이라는 성과를 얻게 되면서 우리 문..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1936~2011) 대통령이 유명했던 것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청바지를 입고 뒷 주머니에 시집을 꽂은 채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상당 부분 하벨이 대통령이 된 후에 윤색된 얘기이거나 그의 전기 영화에 쓸 요량으로 첨삭된 각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벨처럼 시인이나 극작가는 정치를 해서 비교적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역(逆)은 그리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정치라는 영역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끌어 들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는 얘기다.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인문학과 예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예술이 사라진 사회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인민에 봉사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 한들 선전(宣傳), 선동(煽動)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벨이 체코의 벨벳혁명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늘 미완의 혁명이며 때문에 영구적으로 혁명을 수행해 나가야 하되 수평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계속해서 추구해야 한다는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와 그녀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칼 리프크네히트(1871~1919)의 얘기는, 그래서 맞는 말이다. 반면에 수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것 역시 인문학과 예술의 정치에로의 수렴을 거의 생각조차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나라가 거의 최고조의 수준이다. 그래서 정치가 늘 천박하다. 천박한 정치는 사람들에게 냉소를 주고, 그 냉소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지며, 정치적 무관심은 젊은 세대로 하여금 역사적 무지와 정치적 사고의 왜곡을 가져 온다. 예컨대 소위 아이비 리그 중 하나라는 미국 예일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아무리 부동산 부자나 개발론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시장이 됐다 손 치더라도 이 코로나19 정국에서 음식점이나 유흥업소의 영업제한 시간을 22시에서 24시까지 연장하는 것보다는 관객 수가 격감한 극장이나 공연장에 수행원없이 가는 일(시찰보다는 관람)을 정책의 우선순위로 뒀어야 했다. 극장과 공연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안팎의 자영업자까지 거의 문을 닫았을 정도다. 문화를 살리면 경제를 살릴 수 있되 방역의 정치 영역에서 가장 점진적이고도 조심스럽게 자영업자들을 살릴 수 있는 일이다. 법률 공부는 했지만 예술은 별로였던 모양이다. 상상력이 별로이다.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빵만 가지고는 절대로 살 수 없고 결국 장미가 있어야 한다는 영국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 를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강남 쟁골 마을이라는 전원 고급 주택단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희대의 사건(MBC TV '실화탐사대')을 보고 있으면 정치가가 예술적이거나 교양스러워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하벨처럼 예술가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쟁골 마을에서는 진대제 전 장관, 이인제 전 의원, 안상수 전 창원시장, 그리고 다수의 재벌기업 회장 등이 수십억원대의 집을 짓고 살면서 한 젊은 부부가 이웃 해서 작은 집을 짓는 것을 온갖 추접스러운 수단을 써서 방해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그 ‘작은 집’이 자신들의 조망권을 해치고 결국 동네 집 값(진대제의 집은 40억원으로 알려졌다.)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다. 이쯤 되면 거의 악마 수준이다. 이런 자들과 신임 서울시장이 다시 손을 잡고 서울을 부동산 개발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한다. 최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자신의 칼럼에서 하벨을 소환시킨 모양이다. 하벨처럼 윤석열도 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 위해서이다. 이건 전광훈이라는, 자칭 목사라는 자가 본 회퍼의 생을 들이대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 마디로 ‘얻다 대고’이다. 윤석열은 하벨처럼 체코의 ‘프라하의 봄’ 때 저항을 했던 인물이 아니다. 윤석열은 그 반대로 소련의 탱크에 앉아 있었던 군인 같은 인물이다. 전광훈이나 진중권을 두고 견강부회(牽强附會)란 말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 논에만 물을 끌어다 대는 일, 곧 아전인수(我田引水)인 셈이다. 이들 모두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기사들일 뿐이다. 실로 조심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모른다는 것은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고 잘못된 일이다. 지식인들의 논리 정연해 보이는 말들은, 때때로 어떻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애매한 의미를 언어에 부여함으로써,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고 하는 매우 솔직담백한 말이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 인간의 무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현자만이 도달하는 깨달음의 무지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것저것 거죽만 핥은 얄팍한 지식을 갖고 대..
지난 13일 오전, 일본 정부는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발전소 부지 내 탱크에 저장해오던 다량의 방사능 오염수를 해양에 방류하기로 각료회의에서 최종확정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과 유엔도 유감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내에서의 ‘퍼블릭 코멘트’라는 의견공모에서 조차 “방사성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전 세계인을 피폭자로 만들게 되는 것”이라고 거세게 비난하며 70%가 바다 방류를 반대 하였지만 이러한 모두의 우려섞인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한 독선적 판단임이 분명하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명백한 전범국가이다. 본인들의 군국주의 야망에 사로잡혀 전 세계, 특히 동아시아 국가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일으켜 전 세계를 불행의 그늘로 몰아넣은 것이 고작 70여 년 전이다. 전범국으로 본인들의..
떨어진 목련은 걸음마도 못하고 죽은 아기 발바닥 같다 어떤 어미가 있어 잘 드는 칼로 죽음의 발바닥을 벗겼을 것이다 목련나무 아래 한 겹 두 겹 내려놓고 아장아장 걸어가길 한없이 빌었을 것이다 목련나무 아래 사월에는 발도 없는 아기가 와서 발바닥으로만 발바닥으로만 하얗게 걸어다닌다
코로나19로 비대면 활동이 증가하면서 택배물량이 급증했다. 국토교통부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해 전체 18개 택배 사업자의 지난해 택배 물량은 총 33억7818만9000 개였다. 이는 2019년보다 21% 증가한 것이다. 택배 물량은 2016년 20억 개를 돌파했다. 그 후 매년 10% 정도씩 증가했지만 코로나19가 세상을 지배한 지난해에는 평년 증가율보다 2배가 넘는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곳은 택배 회사들이다. 택배 노동자 역시 수입은 늘어났다고 하지만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물량을 처리하다가 급기야 과로사로 숨지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6일 심야·새벽배송을 끝낸 택배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부검결과 과로사 증상인 뇌출혈이 발생했고 심장 혈관이 많이 부어오른 상태였다고 한다. 같은 달 24일에도 한 택배노동자가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8년차인 택배기사인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근무했고 하루 평균 200개에서 250개, 한달 평균 5500~6000개를 배송했다고 한다. 전국택배노동조합에 따르면 지난해 택배 노동자 15명, 올해 4명이 과로사 추정 사인으로 세상을떠났다고 한다. 택배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파트 입주자들은 보행 안전 등을 이유로 택배차량의 지상 진입을 막고 있다. 택배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면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부터 손수레로 각 세대의 문 앞까지 일일이 짐을 옮겨야 한다. 이에 택배노조가 지난 14일 택배차량의 지상 진입을 막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대해 세대별 배송 중단을 선언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가 택배 노동자들을 위한 ‘택배차량 전용주차면’을 조성한 것은 칭찬 받아야 할 일이다. 도는 경기도동물위생시험소, 해양수산자원연구소,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경기주택도시공사,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스타트업캠퍼스, 경기테크노파크 등 총 27개 도 사업소와 공공기관 중 25개 기관에 택배차량 전용주차면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나머지 2곳도 상반기 이전에 완료할 방침이라고 한다. 특히 건물입구와 최대 가까운 곳에 전용 주차면을 만들엇기 때문에 택배 차량과 배달장소와의 동선을 최소화했다. 택배 노동자들은 이 세심한 배려에 고마워하고 있다. 택배 노동자들의 주차 불편이 해소될 뿐 아니라, 노동 강도도 완화되기 때문이다. ‘노동이 존중받는 공정한 세상’을 외치는 경기도가 택배 노동자들에게준 작지만 고마운 선물이다. 도청(북부청사, 남부청사)에 설치된 ‘무인택배함’도 택배노동자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배려다. 과거엔 택배 노동자가 직접 직원들의 근무처를 찾아가 물건을 전해줬지만 지금은 택배함에 배송물을 넣은 뒤 안내문자를 보내면 수령자가 나와서 물건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수령자가 자리에 없어도 배달이 가능한 시스템이므로 노동강도가 크게 줄어든다. 도 관계자는 “앞으로도 이처럼 작은 실천들이지만, 고된 업무를 하고 있는 이동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업들을 발굴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들 역시 택배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
“우리 때는 공장에 가는 학생의 수가 많은 대학 순서대로 명문대였는데, 지금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시험도 거부하며 반발하는 이기주의자가 많은 순서대로 명문대다.”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드는 8090년대의 청년들은 이 시대의 20대 청년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1980년까지 대학생들 대부분은 대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80년대의 대학생들이 제 옷깃에 달았던 대학 배지를 스스로 뗀 일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은 80년 5월, 광주가 짓밟히는 것을 외면하고 침묵했던 자신들이 정의와 진리를 표상하는 대학의 배지를 달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80년대 청년들의 힘은 반성을 실천으로 옮긴 결단과 행동력이었다. 모든 언론이 광주민중항쟁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의 만행으로 도배질을 하고 있을 때,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싸우다 제적당하고, 감옥으로 간 것이 80년대 청년 학생들이다. 고작 ‘가리방’으로 등사한 유인물 몇 장 뿌리고 개처럼 두드려 맞으며 끌려간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검사와 판사들이 구형하고 선고한 형량을 합하면 몇 만 년이 될지 모른다. 그렇게 감옥으로 간 숫자보다 더 많은 대학생이 졸업장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갔다. 1980년대 중반 공장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 3770원이었다. 잔업과 철야는 언제나 관리자의 마음이었다. 오후 3시에 반장이 와서 알려주기 전까지는 자신의 퇴근 시간이 6시일지, 9시일지, 다음날 오전 5시일지 알 수 없었다. 완벽한 무권리 상태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과 친구가 되어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했던 전태일의 외로움에 응답했던 이들이 80년대의 청년 학생들이었다. 90년대 청년들은 87년 6월 민주화 대투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겨우 문을 연 민주주의를 폭넓게 확산시키며 정착시켰다. 분단을 독재의 수단으로 이용해온 권력을 극복하기 위한 대중적인 평화 통일운동의 지평을 한껏 넓힌 것도 90년대 세대의 성취였다. 그러나 8090년대 그토록 빛났던 그 청년들을 바라보는 지금 20대 청년들의 시선은 아주 차갑다. 지금의 20대는 8090세대의 청년 정신이 만들어냈던 신기루와 같은 시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배지를 뗀 8090세대는 대학 간판이 아닌 시대정신을 중심으로 연대하는 청년정신을 발휘했고, 학벌이 아닌 가치 중심의 질서를 만들었다. 서울대도, 연고대도 아닌 한양대의 임종석을 전대협의장으로 뽑고, 지도력이 대학서열 순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님을 그들 세대는 압도적인 대중의 능력으로 입증하며 학벌주의와 소영웅주의를 극복했다. 서울의 이름난 대학의 학생이 옆 학과 학생보다 지방의 유명하지 않은 대학의 전대협 친구와 더 친했다. 8090세대는 가치를 중심으로 연대했고 전대협은 하나의 캠퍼스였다. 그러나 지금 어떤가. 8090세대 청년들이 가졌던 가치 중심의 연대는 거짓말처럼 아득히 사라지고 70년대 이전보다 더 강고한 학벌주의와 서열주의가 다시 자리 잡았다. 서울에 있는 10개 대학의 순서가 조선왕조 족보처럼 통용된다. 40년 전에는 그래도 머리 좋고, 열심히 하면 명문대에 들어가고 개천에서 용도 났다. 지금은 금수저 은수저 쇠수저, 제가 물고 태어난 수저 순서대로 대학에 들어온다. 대학의 서열 따위는 따지지도 않고, 국회의원과 동네호프집 주인이 스스럼없이 형, 아우 하며 지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전대협 캠퍼스 동문들만 모른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다리 하나 보이지 않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지금 20대 청년들의 절망을. 캄캄했던 절망의 시대를 놀라운 씩씩함으로 돌파해냈던 청년 정신의 귀환을 기대한다. 8090세대와 더불어 이 시대의 청년들을 지키는 사수대장 이인영, 이 시대 청년들의 미래를 돌파하는 선봉대장 임종석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을 의장으로 뽑았던 8090의 청년 세대는 그냥 꼰대가 되지 않았다. 8090세대에게는 아직도 반성하고 행동할 줄 아는 힘이 남아있다. 아파하는 이 시대의 청년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등을 내줄 준비가 된 꼰대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르주아 체제의 헤게모니를 가진 소수 지배세력은 물리적 폭력을 발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노동자 계급)을 속인다. 이들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제대로 형체를 갖출 수 없도록 확실한 방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건 부르주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작업이 된다.” 헝거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가 쓴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의 한 대목이다. 이대로라면 자본주의의 지배세력은 “속임수를 제도화”해야만 한다. 왜 그래야 할까? “날이 갈수록 부르주아 체제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이에 도전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 《역사와 계급의식》, 루카치의 고뇌 하지만 그 도전은 그냥 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지배계급에 의해 끊임없이 세뇌되고 자본주의 전체의 구조와 모순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교육, 그리고 지배 사상의 작동이 매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손에 쥐고 있는 언론은 그 대표적인 도구다. 감수성까지도 그렇게 만들어져간다.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 무엇을 혐오해야하는지 조차 입력된다. 심지어 자신을 지원하는 운동과 조직까지도 혐오하게 만든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내세우는 진보정당에 등을 돌리게 하는 냉전체제의 “빨갱이 선동”이 그런 경우다. 자신의 친구와 적을 몰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결집할 수 없게 한다. 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의 손에 《역사와 계급의식》은 비밀 경전처럼 들려져 있었다. 영어판 영인본으로 돌아다니던 책이다.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지니는 것 자체가 감옥행이었던 시절, ‘루카치’라는 이름은 진보적 사유의 한 암호처럼 여겨진 때였다. 접근이 봉쇄된 마르스크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사와 계급의식》의 의미는 또 따로 있었다.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에 따라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 마땅할 진데 왜 노동자들이 보수 또는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논거를 제시해준 책으로 받아들여졌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말의 뜻도 이 책을 통해 깨우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쓴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의 한 문장이 인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래디칼’하다는 것은 문제의 근본 뿌리로 들어가는 작업이다. 인간에게 그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뿌리의 라틴어 어원 ‘radix’에서 나온 래디칼은 속도의 급진성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지만 정작은 “본질적 접근”을 뜻했던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교육이 바로 이 근본을 파고드는 접근을 가로막고 실체와 인식 사이에 베일을 치고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이른바 “물신화(物神化/reification)”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물신화”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당시 쉽지 않았다. 루카치의 주장은 계속 이어진다.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물처럼 되어버리고 결국 상품 가치로만 평가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렇게 인간은 비인간화되고 그의 영혼까지 절름거리게 만들며 기진맥진하게 해버린다. 계급의식을 장착하고 이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지배력이 온 사회를 구석구석 쥐고 흔드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 이후 “물신화”가 무엇인지 절감되기 시작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되는 이해관계로 판단하고 인간적 감정과 사유 그리고 태도는 사라진다. 그런 것들은 이해관계를 관철하는데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다. 이러면서 사람이 기계에 찢겨나가고 깔려 죽는 일이 일상이 된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 인간”이 넘쳐나고 있다. - 물신화의 폭력 결국 사람들은 이런 체제가 “운명적”이라 근본적으로 바꿀 방법은 없고 정책을 변화시키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정치는 그런 기대를 가진 표심에 따라 떠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폭력이 내장되어 있는 체제라면 그런 정치는 피상적인 처방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자본주의 형성 초기 자본이 모아지는 과정을 “자본의 원시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 of capital)”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과정이 “폭력”이라고 단언한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체제로 진입하는 과정은 더욱 그리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그 순서대로 노골적인 폭력을 동원했다. 그 폭력의 이름은 ‘식민지 체제’다. 그리고 이 체제는 국가의 권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봉건체제에서 근대체제로 전환해나가는 과정은 그런 폭력이 산파 역할을 했다.” 물건을 거래하면서 국가가 시장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상업자본이 얌전하게 쌓여가면서 그걸로 부를 축적해 부르주아 체제가 성립해나간 것이 아니라는 역사분석이다. 엄청난 국가폭력이 게재된 체제가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시장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이걸 좀 더 분명하게 밝혀낸 것이 바로 《거대한 전환 (Great Transformation)》을 쓴 칼 폴라니(Karl Polyani)다. 중세 봉건체제에서 농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공유지를 종획운동으로 번역되는 영국의 “인클로우져 무브먼트(Enclosure Movement)”로 해체시킨 사건의 정체를 정밀하게 밝혀낸 것이다. 그건 정치와 법으로 농민들의 것을 영주의 것으로 말뚝을 박아 접근을 금지시키고 사유화(私有化/privatization)한 명백한 강탈행위였다. ‘인클로우저 법안(Enclosure Act)’은 그 강탈행위를 합법화한 것이었다. 공유지에서 생존수단을 강구하고 있던 농민들은 쫓겨나 거지, 부랑자, 강도, 처지가 더 나빠진 농노, 저임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그 삶은 비참해지고 만다. 마르크스가 짚은 바로 그 폭력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근대 자본주의 시장사회의 탄생에는 바로 이 폭력구조가 역사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가난은 그 폭력의 열매다. - 《거대한 전환》, “계획된 시장사회” 칼 폴라니는 이를 “근대 국가의 지배세력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행위”라고 불렀다. 이들이 장악한 의회가 만든 법은 시장사회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속해있는지를 명백히 했다. 그리고 그 의회는 시장사회의 구축과정에 동원한 폭력의 강제성을 법의 이름으로 관철해나갔다. 1994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거대한 전환》 출간 50주년을 맞이해 국제 세미나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칼 폴라니의 딸 폴라니 레빗은 다음과 같이 시장주의의 핵심을 짚는다. “《거대한 전환》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내세우는 시장주의 체제가 시장 자체의 자연발생적 방식이 아니라 ‘계획된 것’임을 입증해준다. ‘자발적’인 것은 도리어 이러한 시장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운동이다.” 오늘날 “민영화”로 번역되는 영어의 원 단어는 “사유화”를 의미하는 “privatization”이다. 민영화는 민간 경영이라는 번역으로 공적 자산을 사유화하는 대자본의 지배구조를 은폐하는 말이다. 이는 법과 정치로 합법이 되고 거대한 자본축적의 동력으로 가동하고 있다. 칼 폴라니의 말대로 대자본의 지배구조를 위해 “계획된 사유화”다. 192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붉은 도시”였다. 사회주의의 진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훗날 신자유주의의 태두가 되는 하이예크의 스승 루드비히 폰 미제스와 그 반대진영의 논전이 펼쳐졌고 여기에 칼 폴라니가 끼어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을 겪고 2차대전이 종료될 시점인 1944년 두 권의 중요한 책이 나온다. 하나는 하이예크의 《노예로 가는 길》, 다른 하나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당시 위세를 떨쳤던 경제학자는 케인즈였는데 하이예크는 애초 케인즈(캠브리지대학)의 논리를 격파하는 작업을 위해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의 초빙을 받아 이 책을 집필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주장한 케인즈와는 달리 하이예크는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를 편 것이다. 하이예크의 책은 출간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가 1970년대에 밀턴 프리드만을 중심으로 한 미국 시카고 학파를 통해 강세를 얻는다. 신자유주의의 원조가 된 것이며 그 실험은 칠레에서 사회주의 정권 아옌데를 쿠데타로 축출한 피노체트 체제에서 폭력적인 실험을 추진하게 된다. 대자본과 군의 동맹체제를 통한 신자유주의의 출범이었다. 공동체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노동운동은 궤멸되어갔으며 민주주의는 뿌리채 뽑혀나갔다.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외피는 파시즘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비정한 현실에서 우리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게 될까? 하이예크일까, 폴라니일까? -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우리의 근대자본주의 체제는 악랄한 식민지 체제의 폭력성까지 내재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박정희 체제가 작동했고 90년대 이후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보이지 않는 수탈체제가 가동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분단에 기반한 미국의 군사력에 지배받고 있으니 그 폭력의 성격은 다층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교육은 역사를 변방에 내몰았고 비판적 지성은 도구적 기능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파편적 현상에 몰두할 뿐, 총체적 구조에 대한 인식은 없다. 그건 분명한 “속임수의 제도화”다. 언론은 이 속임수를 매일 자행하고 있는 중이다. 누가 어떤 법을 만들어서 공공의 자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하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속임수가 교육으로 포장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다양한 폭력을 내장하고 있는 시장사회의 진상을 끊임없이 폭로해나가고 이를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언론이 매일 먹여주는 허위를 진실인 줄로 알고 받아먹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구해내야 한다. 역사를 배제한 몰역사적 사유의 무지를 벗겨내야 한다. 다시 루카치의 말을 들어본다. “애초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드러내는 순간 비판철학은 시동을 걸게 된다.” ‘래디칼’해야 한다. 그래야 답이 보인다. 폭력으로부터 인간,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