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종일 필자가 근무하는 철도가 세간의 화제였다. 열차의 맞은편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윤석열후보의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사진을 보고 “에이 설마?”싶었다. 올해 정년퇴직을 앞둔 철도기관사 입장에서 지금까지 이런 고객은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도 “못봤지.. 예전에는 빈자리 많을 때 신발벗고 앞 좌석에 발 걸치고 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눈치 보여 거의 없는데 어딜 신발을 신은채로.. 말도 안되지”라며 혀를 내두른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는 말이다. 하긴 윤석열후보 입장에서는 구두가 뭐 그리 더럽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과거 국정감사에서 김진태의원이 질의했듯이 윤석열후보는 기업인들과 술자리에서 자기 신발에 양말을 벗어 넣고 술을 따라 마시게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사실이라면 그에게 구두란 술잔이나 다름없을 터이니 말이다. 난 정치인의 사생활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가 집에서 무얼 하든, 점을 보건, 바람을 피건 당신들 일이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 기본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수신제가 클리어 한 다음에 치국을 순차적으로 하란 말은 못하겠다. 그렇게 하다간 아
더러운 육체적 욕망, 독으로 가득 찬 그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온갖 고뇌가 뿌리 없는 덩굴풀처럼 달라붙는다. 그 욕망을 이겨낸 사람은 마치 연꽃잎에서 빗방울이 굴러 떨어지듯이 모든 고뇌가 사라진다. (부처)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힘보다 자신의 욕망의 힘 자체를 더 자랑한다. 이 얼마나 해괴한 미망(迷妄)인가? 지금은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많은 일들이 과거에는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던 일인지를 생각해보라. 지금 너를 혼란 속에 빠트리고 있는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또 네가 여태까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다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상기해보라.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네 욕망을 달래고 가라앉혀라. 그것이 가장 유익한 일이고, 또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삶은 먼저 맞춤(適應)이다. 살았다 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터전을 보게 된다. 삶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둘러쌌기 때문에 환경이라 한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아무도 이것이 왜 변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산 것은 그 변함을 무시할 수 없고 그 변한 환경에 맞추어가야만 한다. 둘째 생명은 대듦(拒否)이다. 맞춰감으로만 보면 생명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영상이 ‘카톡’에 올라왔다. 딸이 촬영한 동영상이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웃음소리부터 쏟아진다.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다. 웃음은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처럼 요란하다. 흔들리는 웃음을 따라 화면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화면 저 편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김진호의 ‘가족사진’이라는 노래다. 흔들리는 화면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는 중년 사내가 비틀거린다. 술에 취한 사내의 비틀거림은 흔들리는 화면과 무관하다. 취한 사내의 입에서 박자를 놓친 노랫말이 흩어진다. 방바닥에 나뒹구는 노랫말을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주워 담는다. “아빠, 춤도 춰야지.” 딸의 주문에 중년의 사내가 두 팔을 치켜들고 비틀어댄다. 흐느적거리는 꼴이 행사장 입구에서 손님을 불러대는 바람풍선 같다. 바람풍선의 두 팔이 허우적거릴 때마다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른다.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소리 같아서일까.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입 꼬리가 먼저 올라간다. 아무리 필름을 되감아도 그날 밤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끊어진 필름 대신 남은 건 술에 취한 중년 사내의 동영상뿐이다. 몇 번을 다시 보았지만, 동영상 속의 중년사내가 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페르가몬 신전의 부조 독일출신 작가 패터 바이스(Peter Weiss/1916~1982)의 소설 『저항의 미학』은 1937년부터 1945년 반(反)파시즘 저항운동을 그려낸 작품이다. 시기적으로는 작가의 20대를 옮긴 셈이기도 한 이 소설의 첫 대목은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의 부조(浮彫)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이 박물관은 기원전 고대 그리스 제국의 한 국가인 페르가몬에 있던 신전(神殿)이 흙속의 파편으로 발굴되면서 그걸 다시 조합해 아예 독일로 옮겨 만들어진 전시공간이다. 고대 도시의 정신세계를 새겨놓은 이 부조 작품은 제우스가 이끄는 신들과 거인족 사이의 전투를 담아낸 신화를 펼쳐 놓았다. 패터 바이스가 소설의 첫 장에 기록한 문단을 압축해 보자면 이렇다. “사방을 에워싼 석벽에서 몸뚱이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언제나 싸우는 몸짓이다. 피하고 쨉싸게 몸을 빼고, 공격하고, 몸을 막고, 몸을 쭉 뻗어 일으키고, 잔뜩 웅크리고. 비록 여기저기 지워졌지만, 불끈 버티고 있는 왼발, 휙 젖힌 등짝, 윤곽만 남은 장딴지 하나로 그것들은 하나의 공동의 움직임으로 맞물리며 어우러졌다.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신화는 제우스의 편에 섰지만 소설의 주인
자기완성은 내면적인 일이기도 하고 외면적인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없이는, 또 그들과 서로 주고받는 영향이 없이는 진정한 자기완성을 이룰 수 없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완전하듯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성서(마태 5장 48절)에 씌어있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똑같이 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완전성에 조금이라도 다가서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완전하라’는 본문 그리스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원뜻에는 ‘본래됨’ 혹은 ‘있는 그대로’의 의미도 있고, 영어성경 NIV는 이를 mericiful(자비함)으로 번역했다. 옮긴이) 불순물이 전혀 없는 완전성, 그것이 곧 신이며, 신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이다. 자기완성을 향해 줄곧 정진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며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선이 선인 줄 알고 악이 악인 줄 알 때, 그 사람은 굳게 선을 지키고 악에서 멀어질 것이다. (공자) 나는 아무리 배움이 적을지라도 이성의 길을 더듬어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두려워해 할 것은 오직, 그렇지도 않은데 깨달은 척하는 것이다. 최고의 지혜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마이클 돕스가 쓰고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의 박수민 대표가 번역한 다소 장황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그래서 이른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미국 작가 조너던 사프런 포어의 소설 제목이자 영국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톰 행크스와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았다.)’ 느낌을 주는 책 『1962–세기의 핵 담판과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은 논픽션 르포르타쥬이다. 그런데 실로 내용이 너무나 다이나믹하고 풍부해서 한편의 밀리터리 첩보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다큐를 이런 식으로 쓴다. 한 권의 대하소설처럼 쓴다. 그래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 책 『1962』는 그런 면에서도 귀감이 된다. 제대로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나 역사학자가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등급 차이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1962』는 1962년의 급박했던 미국-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다룬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비엔나에서의 미-소 정상회담 때 했던 약속을 뒤집고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비밀리에 조성한다. 그리고 핵 탄두를 반입하기 시작한다. 뒤늦게 이를 안 존 F. 케네디 정부
1. 대통령이 현 정부를 “적폐 청산 수사 대상”으로 공격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비판했다. 사과를 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거기에 대해 답변하고 사과하면 깨끗하게 끝날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발단이 무엇이든 간에) 윤석열의 공격은 뚜렷한 프레임 전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도 안 남은 대선국면 막바지에서 스스로를 문재인 정부를 대적하고 대체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포지셔닝시키려 하고 있다는 뜻이다. 명실공히 여권 수장인 대통령과 충돌이 격화되면 될수록 대중의 인식 속에서 차지하는 야권 후보 윤석열의 덩치가 압도적으로 커진다. 충돌 사건의 드라마틱한 흥미효과로 인해 '윤석열' 이름 석 자가 언론과 sns에 맹렬한 기세로 노출되고 각인된다. 대중적 관심의 독점 효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언론지형에서 미디어들이 신나게 해당 사안을 퍼 나르고 더욱 증폭시킬 거란 점이다. 이런 순환이 두어 바퀴 돌고나면 어떻게 되나. 윤석열은 문재인을 대체하는 차세대 권력으로서 상징적 이미지를 보다 공고히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이 해당
죽음과 고통이라는 악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가 자기 육신만을 위한 동물적 존재로 떨어졌을 때이다. 이 경우 죽음과 고통은 허깨비처럼 사방에서 그를 에워싸 그를 사람의 길, 곧 사랑이라는 신의 법칙을 실천하도록 내어몰아간다. 신의 법칙에 따라 사람에게는 죽음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건강, 희열, 애착의 대상, 생생한 감정, 기억력, 일에 대한 능력,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저버리고, 태양마저 차갑게 식어 인생이 그 모든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신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돌처럼 차갑게 살아갈 것인가? 대답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합류시키는 일이다. 마음이 평화롭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편안함을 느낀다면 무엇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랴! 너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습의 너이면 된다. 나머지는 모두 신의 몫이다. 만약 신의 사랑이라는 것이 없고 있는 것은 오로지 만유의 법칙뿐이라 해도, 역시 인간으로서의 의무야 말로 모든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아미엘) 우리는 신의 법칙을 예부터 있어 온 여러 종교의 가르침에서 배울
어릴 때 나는 아침마다 밥 먹기가 힘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에게 정성껏 차린 건강음식을 강력하게 압박해 먹이셨다. 아침식사 끝에는 노란콩을 갓 삶아 식혀서 믹서에 갈아주시는 두유, 생토마토를 금방 간 토마토 주스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인스턴트, 화학첨가물이든 재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다. 뇌와 장건강에 좋은 천연재료의 한식으로 가득 채워 밥상을 차려주셨다. 그 영양 가득한 음식들이 몸의 건강뿐만 아니라 마음을 든든하게 지탱해 준 것을 그때의 나는 전혀 몰랐다. 맛있는 라면이나 화려한 기름진 빵과 과자들이 장바구니에 없다고 서운해하며 입이 쑥 나왔을 따름이었다. 거의 그 후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진료실에서 그때의 나와 같은 이들을 만난다. 그 아이는 빵을 좋아하기도 하고 멋진 빵을 곧잘 만든다. 라면을 좋아하는 불닭볶음면 마니아기도 하다. 식사는 코로나 19가 시작되고는 배달음식을 자주 시켜 먹는다. 과일과 야채는 거의 안 먹는다. 아이는 몇 년 전에 친한 친구가 함부로 대해서 속상한 것을 혼자서 견디다가 힘들어 죽고 싶어졌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학교를 그만두었고 양약치료와 상담치료를 시작하였다, 많이 호전되어 최근 복학했는데 친구들과…
폐소공포증 없으시죠? 침 삼키시면 안 돼요. 주무시면 안 돼요.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전신이 둥근 통 안으로 들이밀린다. 없었던 폐소공포증이 고개를 들고 숨이 가빠진다. 안 된다는 말 때문일까, 침이 차오르고 입술이 바싹 마른다. 디스크가 의심되어 시행한 경추 MRI 촬영. 목 옆으로 끼워 넣은 쿠션 때문에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고 어깨와 목은 점점 더 뻣뻣해진다. 온통 하얀 공간에서 귀마개 밖으로 들리는 드릴 소리와 망치 소리에 스멀스멀 공포감이 차오른다. 괜찮다. 다 지나간다. 조금만 참으면 돼. 오롯이 홀로인 공간에서 자신을 다독이며 여행을 시작한다. 오로지 나를 위한 상상여행을. 코로나 시대 2년 차, 비일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여행은 새로운 옷을 입었다. 하얀 막 안에서 자신이 내뱉은 숨을 들이마시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벽 안에 가두고 타인을 걸어 다니는 병균으로 여기며 점차 예민해졌다. 꼼짝할 수 없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코로나블루가 심각해졌고 온라인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추억여행과 랜선여행으로 자신을 달래던 사람들은 전 세계를 장악한 바이러스의 기세가 약해질 때마다 소도시로, 소수의 사람들과, 소확행 여행을 떠났다. 어떤 여행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