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는 달빛이 가장 좋은 날이다. 아주 큰 보름달이 가을의 중간에 있다고 한가위이다. 햇볕의 도움으로 가을이 완성될 텐데 조상들은 어둠 속 달빛이 가장 빛나는 날 ‘中秋之月’를 한가위라고 했다. 가을의 중간이라고 하지만 초가을이다. 옥수수는 아직 여물지 않았고 벼는 지금부터 누릿해진다. 그럼에도 햇곡식을 조상들에게 먼저 드린다. 둥그런 보름달과 다시 일그러질 달의 인력(引力)을 보면서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술 한잔 마시는 날이다. 고향에서도 한가위를 즐긴다. 한가위라는 말보다는 추석이라고 했다. 농촌에 시집간 언니가 햇 곡식을 가져오면 그것으로 제상을 차리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들이 지금의 생활에 비하면 가난하고 가난해서 어느 때가 나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추석에는 풍성했다. 추석에는 남쪽처럼 공휴일이 있고 배급이 공급될 때는 식용유에 돼지고기가 배정되었다. 미 공급에는 그런대로 밭에 풋 강냉이가 있었고 주런히(나란히) 붙어있는 하모니카 집들에는 덕대에 올린 포도가 익었고 지붕에는 둥그런 호박이 있었다. 고향에서도 남쪽과 마찬가지로 추석에는 송편을 빚는다. 북쪽 고향의 송편은 반달 모양으로 아주 크게 빚는다. 소나무 가지에 붙은 가시바늘 같은 잎
경기도가 내년부터 도 관할 지방도에서 발생하는 보행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마을주민 보호구간 개선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을 통해 마을을 통과하는 도 관리 지방도에 마을주민들의 안전을 위한 교통안전시설을 대폭 보강하겠다는 것이다. 시·군, 경찰과 함께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 전방 100m부터 끝나는 지점 후방 100m까지를 ‘보호구간’으로 설정한 다음, 안내표지, 노면표시, 미끄럼방지포장, 과속단속카메라 등 교통안전시설을 설치할 계획이다. 해당구간의 제한속도도 10~30km/h 낮춘다. 도는 우선 개선이 시급한 지방도 15개 구간에서 시범사업으로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보행자 교통사고는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방도 마을주변 도로에서 많이 발생한다. 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1~2020) 경기도 내 보행 교통사고는 9만 9254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3318명이나 사망했다. 특히 국도 등 기타 도로보다 지방도 보행사고 사망자 발생률이 훨씬 높았다. 국도의 경우 국토교통부가 마을 인근 국도의 일정 구간을 ‘마을주민 보호구간’으로 지정한 바 있다. ‘마을주민 보호구간’은 현재 전국 89개 시·군, 246개 구간(357㎞)에 시범사업으로 설치
한국 은둔형 외톨이 부모회란 단체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예전에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한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책 내용을 가지고 비대면 화상 강의를 부탁한다는 말씀이었다. 우리나라 19세~39세 연령대에서만 37만 명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은둔형 외톨이는 본인과 가족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됐다. 빨리 전문가 상담을 지원해서 그분들이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아픔과 자활 방법을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본인과 가족의 고통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싶어서 여러 번 고사했다. 그러다 강연을 수락한 것은 ‘선택하지 않는 선택’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였다. 트롤리 딜레마란 사고 실험이 있다. 지금 전차가 달려오고 있는데, 다섯 명이 선로에 묶여 있다. 그냥 두면 다섯 명 모두 희생될 것이다. 비상 레버를 당기면 열차는 선로를 변경하고, 다섯 명 대신 한 명만 죽는다. 당신은 레버를 당길 것인가, 아니면 당기지 않을 것인가. 어떤 선택이 윤리적으로 올바른가. 이 실험은 숱한 변종을 낳았고, 다양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대체로 70%가 넘는 대다수가 레버를 당겨 한 명을 희생시킨다를 선택한다고 한
여자의 마른 장작 같은 발목이 리어카를 민다 리어카에는 납작해진 종이상자와 고물이 어린 식구(食口)들처럼 모여 앉았다 지붕 없는 지상의 방 한 칸 칭얼거리는 폐허를 발목이 밀고 간다
아플 때는 마음이 무겁고 절박하기 때문에 의사의 말 한마디에 안심과 걱정이 교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의사의 말은 가치중립적이고 방어적이다. 아마 환자의 과한 해석을 방지하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표현이라 짐작한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면 치료효과가 높아짐은 당연하다. 명의의 조건에는 의학적 치료능력뿐만 아니라 환자와의 공감과 소통능력이 큰 몫을 한다. 의사의 환자에 대한 공감 없이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과학인 의료에서도 의사와 환자의 소통이 이렇게 중요하다. 바야흐로 대선을 앞두고 정치의 시대가 만개하였다. 정치는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난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언어가 다 킹스스피치일 수는 없다. 소속정당과 이해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여론결집을 위해서 선동할 수도 있고 편을 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정치는 대화, 타협을 통하여 갈등을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지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국정감사 시 본인은 면책특권 속에 숨어서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를 통해 주목효과를 높이고 거기서 생기는 피해와 인격적 살인은 나몰라라 하는 의원들 많이 봤다. 저급한 언어폭
폭력은 오로지 혐오감을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위대함이라는 옷을 걸치고, 존경심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특히 해롭다. 폭력으로 우리를 강제하는 자는 우리의 권리를 빼앗는 자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증오한다. 반대로 우리를 설득하는 자는 우리의 은혜자로 사랑한다. 어리석고 거칠고 무지한 사람일수록 폭력에 호소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데는 많은 협력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설득을 하는 데는 협력자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지혜로 설득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도 우애의 정으로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더 유리한데, 그 사람을 배제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폭력과 강제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현존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담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현재의 체제는 폭력이 아니라 일반 여론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폭력은 그 여론의 작용을 파괴해버린다. 그러므로 폭력의 행사는 그것이 유지하고자 하는 것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괴할 뿐이다. 인간은 원래 타인을 강제하거나 타인에게 굴종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이 두 가지 습관은 사람들로…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영업자들의 극단적 선택이 잇따르고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 재확산 기세도 심상치 않다. 코로나19를 종식하고 자영업자들을 살리는 일은 영락없이 한꺼번에 잡아야 할 두 마리 토끼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정치권과 정책 당국이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 해답이 쉬운 문제라면 정치와 정부에 국민이 왜 권력과 혈세를 내어줄 것인가. 일단 도무지 수그러들지 않는 재확산 추세를 무조건 꺾어내는 일이 급선무다. 시민의식의 발현이 절실하다. 서울 마포에서 23년째 유명 맥줏집을 운영하던 50대 A 씨가 지난 7일 가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제 전남 여수에서도 치킨집 사장이 생활고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코로나 19 확산에 따른 영업난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자영업자들은 최소한 15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운영비 감당은 물론 생활비마저 바닥이 난 자영업자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다. 이 비극은 명백히 국가사회와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엄중한 과제다. 지난 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예금은행의 전체 개인사업자대출 잔액은 413조 1000억 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이 지금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 것 같다. 한 세대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위기의 국면을 지나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탓일까? 흔히 위기의 원인을 실용학문을 우대하는 세태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서울대학교 인문학 교수들이 전공의 영역을 벗어나 학제간 소통에 나섰다고 한다. 인문대 학장인 철학과 이석재 교수와 국문과 박진호 교수, 영문과 안지현 교수, 종교학과 김지현 교수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석재 학장은 이 소통이 좁은 의미의 한국학을 벗어나 융합적 보편성을 찾아보려는 도전이라고 했다.(교수신문, 20201년 9월 8일자) 그러나 인문학의 경계는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학자와 경제학자들과도 교류한다고 하지만 귀동냥 수준을 넘지 않을 것 같다. 대학교수들은 학과라는 웅덩이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렇게 가끔 문을 살짝 열고 이웃집과 대화하는 정도에 머문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종국에는 증발하고 황폐해진다. 이 분들이 진행한 워크숍에는 계몽주의라는 주제가 있다. 철학의 역사에서 계몽주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수학과 자연과학의 기초 위에 지어진
까망이와의 이별은 빨리 찾아왔다. 형이 확정되자 이감 통보는 하루 전에 이루어졌다. 나는 보안과장에게 가서 까망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주장했지만 내 목소리는 높지 못했다. 모 재소자가 자신이 키우던 앵무새를 데리고 이감 간 케이스가 있기는 했다. 그 재소자는 무기수였다. 내 저항은 허무하게 끝났다. 나는 터덜터덜 돌아와서 짐을 쌌다. 나는 까망이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까망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까망이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제 까망이는 8개월이 지나서 제법 몸집이 커졌다. 나는 까망이를 내 가슴 위에 올려두고 같이 잠을 청했다. 까망이 숨소리를 더 많이 기억하고 싶었다. 까망이는 사지를 쭉 뻗어서 코를 내 턱에 박고 가르릉 소리를 냈다.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 새벽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까망이가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까망이 뒷발을 살짝 잡았다. “가지 마. 바보야, 나, 간다고….” 까망이가 내게로 와서 혀로 얼굴을 한번 핥더니 이불을 젖히고 나갔다. 이내 식구통 너머로 사라졌다. 짐은 단출했다. 그간 보던 책은 전부 집으로 부쳤다. 더블백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특사 동지들의 배웅을 받고 보안과로 향했다. 다행히 까망이는 보이지 않았다. 특
막내가 왔다. 현관문이 삑삑거리기 시작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캐리어 가득 빨래를 챙겨 온 막내는 씻기도 전에 ‘배고파’를 연발했다. 삼분이나 걸렸을까. 초스피드로 씻고 털고 말린 막내는 팬티 바람에 식탁에 앉았다. 자다가 불려 나온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미친 놈, 시간이 몇 신데”를 연발하면서 밥상을 차렸다. 막내는 양푼에 밥을 비벼가며 냉장고 잔반을 처리했다. 고추장 냄새는 알싸하고 들기름 냄새는 달달했다. 아내는 맞은편 식탁에 앉아 꾸벅 졸았다. ‘꾸벅’과 ‘꿀꺽’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상봉하였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사회적 거리두기와 상관없이) 모자의 상봉을 관전했다. 다행히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별다른 지시를 내게 하명하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청춘은 애달프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별 수 없다. 비대면(非對面)이 일상인 캠퍼스에 낭만은 없다. 없는 낭만이 꿈꾼다고 생겨날까. 보이는 것이라곤 불확실뿐인 시대에 낭만에게 할애할 여유는 없다. 막내는 학교 담 너머에서 자취를 한다. 비대면 수업이 일상이라지만 교수연구실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막내에겐 ‘해당사항 없음’이다. 싫든 좋든, 해가 뜨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