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즉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인생의 필수조건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남을 시켜 하게 할 수는 있지만, 노동에 대한 육체적인 욕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자신에게 필요한 훌륭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대신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을 시켜 일하게 하며, 정작 자신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어리석은 일을 궁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노동을 강요당하며 억지로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모두에게 좋지 않다. 왜냐하면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파멸시킨다는 점에서 불행하고 후자는 가혹한 노동에 의해 육체를 소모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역시 일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사람보도 낫다. 영혼은 육체보다 존엄하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 그 자체가 너희에게 있어 일차적인 것이고, 그 대가는 이차적인 것이라면 노동과 그 창조자인 신이 너희에게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노동이 이차적인 것이고 그 대가가 일차적인 것이라면, 너희는 대가와 그 창조자인 악마의 노예가 될 것이다. (존 러스킨) 모든 육체노동은 인간을 고결하게 한다. 어린이에게 일하는
얼마 전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직후 중국 충칭에서 우리나라로 귀국하는 과정 중 상하이 장완비행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자 군 통수권자의 신분으로 한국광복군을 공개 사열하는 사진이 발견됐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연합뉴스 2월 28일자). 이 사진은 상하이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945년 발행 잡지 '승리'(勝利) 제11호에 실린 프린트를 발견한 것이다. 이 기사를 보고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사진 한 장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기록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사진 한 장은 다양한 분야의 역사를 이어주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먼저, 사진 한 장이 표현하는 구체적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2016년 광화문 현판의 색깔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었다. 결론은 흰바탕에 검정글씨였는데, 이때 가장 결정적인 단서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촬영된 사진인화물과 유리건판이었다. 물론 당시 광화문 사진 중 현판을 집중 촬영한 사진이 없는데다 흑백이라는 한계 때문에 여전히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 다음으로, 사진 한 장이 전하는 역사는 매우 풍부하다. 광화문 글씨를 확인하기 위해 확인한 사진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이 신도시 예정 지역인 광명·시흥에 100억원대의 땅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총리실 지휘아래 3기 신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LH뿐 아니라 국토부, 관계 공공기관에 걸쳐 발본색원, 전수조사를 지시한 것도 그만큼 사안이 엄중함을 의미한다. 우리 공직사회의 도덕적 해이는 오랜 역사와 뿌리를 갖고 있다. 권력형 게이트는 물론 세무비리, 각종 뇌물, 특혜성 비상장주식 보유, 자녀 입시·취업 특혜, 성상납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TI)는 2020년 한국의 국가청렴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가운데 23위로 발표했다. 전년보다 4계단 올랐지만 여전히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우리 사회의 구조를 보자. 우선 이번 사건을 맡는 정부의 전담팀은 도마위에 오른 LH 직원은 물론 국토부와 관계 기관 등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것이다. 그런데 조사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제대로 이뤄질까. 역대 정부에서 보면 관료 집단 이기주의로 조사 과정에 보호막이 쳐지고, 설령 비위 사실이 더 드러나도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어 축소지향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
내 방에는 아직도 예전의 카세트테이프들로 가득하다. 그 시절 돈이 모이는 대로 레코드 가게에 달려가 하나둘씩 사서 듣고 모았던 보물 같은 것들이, 이제는 먼지 쌓인 골동품이 되었다. 가끔 옛날 생각날 때 한 번씩 듣고 싶어도, 플레이어가 없어 이내 다시 내려놓게 된다. 차에서 들어볼까 하다가도, 요새 카 오디오는 카세트는커녕 CD 플레이어마저도 없는 게 대부분이라 또다시 포기하고 스트리밍 앱을 켠다. CD가 나왔을 때 일부 마니아들은 아날로그 방식의 LP에 비해 절대 음질이 떨어지기에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관리와 운용의 용이성 덕분에 CD는 LP를 누르며 차세대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고, 나름 오랫동안을 음악을 담는 중요 매체로 살아남았다. 그 후 대안으로 MD가 나왔지만 실패하게 되고, MP3의 등장 이후 그 무형의 파일을 재생해 주는 MP3 플레이어가 잠시 득세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변화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LP와 카세트의 시대에서 CD로 그리고 MP3 파일을 지나 이제는 스트리밍의 시대가 되었다. 긴 세월의 전통적인 음악 재생 기기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는 전화가 부가 기능이 되어버린 것 같
식해(食醢)와 식혜(食醯)는 같은 것인가? 사전을 뒤져보니 식해의 醢(육장해)는 숙성시킨 음식으로 젓갈 또는 肉醬이라고 되어 있다. 식혜는 식초(食醋)라는 의미도 있고 술이나 알콜 성분이 들어있는 것으로 전통음료로 분류된다. 즉 남쪽에서는 식해와 식혜를 구분하고 있다. 북쪽에서는 구분하지 않고 통칭 식혜(Sikhye)라고 한다. 북에서의 식혜는 생선을 기본 재료로 발효시킨 것이다. 음료인 식혜는 흰쌀밥 또는 찹쌀밥을 길금에 우려낸 물에 넣고 삭혀낸 것이다. 초(醋)로 발효되고 삭혀지는 화학적 과정은 같으나 식해와 식혜는 다른 것이다. 조선중기의 기록에도 생선을 절인 젓갈을 혜(醯)라고 했으니 식혜는 명태식혜, 가재미식혜 등이다. 식해와 식혜가 다른 것은 食醯(식혜)는 북쪽 지역인 함경도 특산으로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명태나 가재미 등을 식재료로 사용하면서 식혜라는 언어로 자리 잡았을 것이고 그에 비해 남쪽은 쌀이 많이 생산되니 음료인 식혜로 구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함경도 특산인 가자미식혜는 실향민들과 그 후손들이 기억하고 있는 고향음식이다. 강원도 속초에 함경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바이 마을이 있다. 잠시 머물다 돌아갈거라 생각했던 그들은 고향에 가지
윤석열 검찰 총장이 다시금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민주당의 중대범죄수사청 설립 추진 덕분이다. 검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검찰에 지나치게 힘이 쏠렸었고, 힘이 넘치면 어떤 존재이든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권 조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권력 분산을 통한 상호 견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힘의 분산”이 아니라, “힘의 박탈”인 것 같아 걱정스럽다. 박탈된 힘은 다시 어디론가 “전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이된 힘”을 소유하게 된 존재는 다시금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지난 자유당 정권 시절, 경찰이 부패와 문제의 근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런 예견은 충분히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권력이 선(善)하면”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 “선한 권력”은 없다. 권력의 속성은, “타인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설사 선한 권력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선한 권력이 항상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검찰 수사권의 완전 박탈은 우리나라 형사법체계,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종이에 눈동자를 베인 것처럼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작은 십자가 달린 묵주가, 손목에도 목에도 심장에도 주렁주렁 달고 다닐 묵직한 묵주가 필요하다니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니까 불의 나날을 맨발로 버티며 검은 보자기로 태양을 덮어 버리고 잠시 어둠 속에 머물면서 마음이 착해지기를 기다리고 싶은 순간들 그런 날들이 있지 당신은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구겨진 종이 같은 얼굴로 새로 산 묵주를 들고 축성 받는 순간에도 비워지지 않는 마음속 돌덩이 다시는 순수해질 수 없다는 것* 그냥이라는 말이 주는 무거움 명동성당 성모 앞에서 오래 기도하는 사내의 목 없는 뒷모습을 보며 그건 그냥이 아니라니까 * 조정권, <화해> 중에서 약력 ▶ 대전 출생. ▶[서정시학](2007)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슬픔이 움직인다』. 연구서 『정체성의 형성과 한국 현대시』 등. ▶현재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 인문학부 조교수.
창밖에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고흐가 생 뽈(Saint Paul) 정신병동에 들어간 1889년 어느 여름날, “그가 본” 바깥 풍경이었다. 고흐가 화실로 썼던 방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남아 있는 이곳은 본래 11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었다. 1605년 프랜시스코 교단의 한 수도자가 여기에 정신병동을 세우자 아예 그렇게 역할이 바뀐 지 오래였다. 별이 빛나는 밤, 그 탄생 빈 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태어난 자리는 “침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그림 바로 옆 작은 방이었다. 고흐에게 특별히 주어진 화실이었다. 생 뽈 시절은 기묘하게도 고흐에게 가장 많은 작품들이 그려진 시기였다. 그의 정신은 뭔가에 감전된 듯 폭발 상태였다. 고흐에게 힘겨웠던 건 밤에 본 풍경을 낮에 되살려 그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마을은 근처 생 레미(Saint Remy)를 떠올렸다.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출생지로 유명해 사람들이 법석거리는 이곳을 그는 조용한 시골동네로 바꾸어 그렸다. 한 켠에는 사이프러스(Cypress)라고 불리는 측백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높다랗게 서 있다. 12세기에 세워진 생 마르탱(Saint Martin) 성당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고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