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패전국이다. 전세계 특히 동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국가다. 군국주의의 폐해를 누구보다 절실히 경험한 국가다. 이러한 일본의 경험은 몇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일본 헌법 제9조 제1항은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고 천명한다. 평화헌법이다. 일본 총리는 자위대를 사열할 때 중절모까지 갖춘 턱시도를 말끔히 차려입어 군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 그러나 절대로 거수경례는 하지 않는다. 단지 오른손으로 중절모를 벗어 왼쪽 가슴에 댈 뿐이다. 이는 민(民)에 의한 자위대의 통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다. 어느 사회이든 군과 경찰은 모든 폭력을 독점한다. 폭력을 독점한 군과 경찰을 '민'이 통제하면 민주국가 그렇지 않으면 독재국가가 된다. 그런데 군대라는 절대적 폭력을 독점한 군을 민이 무력으로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민은 민주적 정당성을 통해 군을 통제한다. 보통·평등·비밀 투표라는 절차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한 민주권력은 이를 기반으로 군을 통제한다. 그리고 쿠데타는 군이 시민의 자발적 복종을 획득한 민주권력의 통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1. 쌍둥이 배구선수가 학폭 가해자였다는 폭로로 소란하다. 중학생 때부터 동료 여럿을 때리고 부모를 욕하고 돈을 뜯고 칼로 협박도 했다니 기가 막힌다. 대회 나가 성적만 내면 모든 게 용서되는 작금의 엘리트 학교 체육이 이런 괴물을 빚은 게 아닌가. 어린 학생에게 사회성과 인성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부모와 지도자들도 호되게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걸 관행이란 이름으로 용인하고 어쩌면 조장하기도 했던, 금메달 지상주의 대한민국 전체가 반성할 일이다. 쌍둥이의 악행이 고발된 뒤로 다시 또 다른 선수 두 명이 학폭 가해자로 지목됐다. 고환을 걷어차인 피해자는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사과는커녕 ‘부랄 터진 놈’이란 모욕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학생 때 저지른 잘못과 뉘우치지 않는 모양새는 남녀가 동일했는데, 폭로 이후의 대처는 약간 달랐다. 쌍둥이와 부모, 구단 등 관계자들은 짧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침묵 속에 숨었고(무기한 출전정지라지만, 그 무기한이 ‘언제고 때만 되면’이란 뜻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다른 선수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남은 기간 출전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결정된 바는 없지만 여론도 조금 다른 듯하다. 쌍둥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 현상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생계와 일상을 잃었고, 사회적 거리두기, 여행, 문화체육시설의 이용이 제한되는 등 급변한 환경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피로의 증가가 초래되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백신접종과 개인 예방수칙 준수 이외에 신체적,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고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거나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실내에서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홈 트레이닝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유튜브 등 동영상 사이트에서 운동기구 없이 혹은 운동기구를 활용해 운동할 수 있는 홈 트레이닝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홈 트레이닝 경우 운동전문가의 지도 없이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운동을 할 경우 신체에 무리를 주고 근골격계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따라서 실내에서 혹은 실외에서 운동의 효율을 높이고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준비운동을 하고 스트레칭을 한 후 본 운동과 정리운동을 하는 순서로 진행하되 본 운동 시에는 근력 운동을 먼저 하고 유산소 운동을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장기간 집콕 생활로 체중을 관리하는데 실패하여 다시 운동을 통해 다이어트를 실시할 경우…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자연의 혜택을 누릴 권리와 존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 왜곡되어 있고 주요 가르침이 전혀 실천되지 않고 있다. 그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자 형제자매이고 각각의 생명은 신성불가침하다는 가르침이다. 진정한 평등은 신분 제도와 칭호와 특권의 폐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낳는 최대의 무기인 폭력의 근절을 요구한다. 평등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사회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없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이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정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된 종교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남들보다 강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므로, 평등 같은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보다 강하고 영리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가 더욱 필요하다고 리히텐베르크는 말했다. 왜냐하면 강하고 똑똑한 강자들의 약자에 대한 박해가 무서운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권리의 불평등까지 자아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깎이면 나라 역시 쇠잔해지는 법이다. 그러니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
설 연휴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뉴스 보기가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도무지 끊이지 않는 후진국형 아동학대와 치사사건 소식 때문이다. 가정, 어린이집을 막론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을 접하며 문득 친부모이건 아니건 성인들의 아동학대가 우리 사회의 치유 불능 병폐가 된 건 아닌지 걱정이 치솟는다.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망가지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나. 인천 서부경찰서는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인천시 서구 한 국공립 어린이집 보육교사 2명을 구속했다. 어린이집 폐쇄회로(CC)TV에서 확인한 교사들의 학대 의심 행위는 놀랍다. 이들이 자폐증 진단을 받거나 장애 소견이 있는 5명을 포함한 1~6세 원생 10명에게 휘두른 학대행위는 불과 2개월 사이에 각각 50~100여 차례에 달했다. 이 어린이집의 다른 보육교사들의 학대 의심 행위도 50건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10일 경북 구미의 한 빌라에서는 2살 여자아이가 숨진 채 미라의 모습으로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아이의 친부는 오래전 집을 나갔고, 친모가 6개월 전 빈집에 아이를 혼자 버려두고 이사를…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본 궤도에 올랐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비젼은 “평화로운 한반도, 번영하는 동아시아”이다. 첫째 원칙은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이고, 둘째 원칙은 남북협력과 국제협력의 조화이다. 이를 위해 한국이 취할 기본전략은 첫째, 비핵화-평화체제-관계정상화. 둘째, 남북관계 발전전략의 다변화이다. 2018년 개시된 평화프로세스는 관련국들 간 일련의 정상외교로 비핵화-평화체제-관계 정상화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이후 2021년 현재까지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2021년 1월에 개최한 제 8차 당대회에서 경제 실패 성찰속에 대내외 어려운 상황에도 자력갱생과 자강의 기틀을 마련하고, 핵무력 건설 완성 등으로 국방력 강화로 병진 노선으로 승리후 적극적 대외활동 전개를 밝혔다. 경제와 핵 병진노선은 2019년 12월 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것으로 하노이 노딜 이후 정리된 북한의 전략이다.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가 버틸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핵무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여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북한 경제에 부
오월은 멀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 이 들린다. 노랫말의 모태가 된 시 ‘묏비나리’를 지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노동자, 빈민의 편에 서서 독재와 싸우고 통일 운동에 헌신했던 그의 족적이 노래의 장엄함을 더한다. ‘민중의 애국가’가 된 이 노래는 국경을 넘어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독재와 탄압에 맞서는 시위현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아이돌 가요처럼 한류를 만든 민중가요다. 2년 전, 홍콩시민의 범죄인 송환 법안 반대 시위 현장에서도 불렸던 이 노래를 두고 한 신문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시아 각국에서 불리는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이라고 소개했다. 스텐카 라진도 낯선 단어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과는 또 무슨 관계일까. 스텐카 라진은 7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의 시위 현장에서, 더 멀리 가면 광복 전 독립군들 사이에서 불렸던 러시아 민중가요로 17세기 중반의 러시아 농민반란 지도자 이름이다. 우리나라 동학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같은 존재이기에 그를 기린 민중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도 비견된다. 러시아 남동쪽 국경지방인 카자크(Kasak)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스텐카 라진은 차르 폭정…
건강한 뉴스소비자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심각한 정파적 편집증을 앓고 있는 언론들 때문이다. 뉴스를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되는지 한 번 더 생각한다. 일종의 ‘뉴스 의심증’이다. 억지춘향식으로 짜맞춘 기사는 아닌지,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해 꾸민 기사는 아닌지…지향이 다른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판단해야 완전한 뉴스를 얻게 된다. 이런 불편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개선될 기미가 없어서다. 중병을 앓아도 진단과 처방이 정확하고 환자가 잘 따르면 희망이 있다. 검진결과는 ‘저널리즘 원칙 무감각증’이다. 처방전은 “환자(언론)가 처방약(저널리즘 원칙 준수)을 상당기간 꾸준히 복용하고 기다려야 살 수 있다”는 게 공통된 진단이다. 그러나 이 처방전을 따르는 언론사는 거의 없다. 과거 선배들이 했던 경험요법에만 집착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들이다. 이런 식이다. 힘 있는 자를 최대한 비틀고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그 대상은 대통령이 가장 좋다. 신임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가 일본보다 늦으면 한국이 무시 당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린다. 바이든에 앞서 시진핑과 통화했다고, 왜 미국에 앞서 중국이냐고 힐난이다. 미·중 강대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현실은 안중에 없다.
사람은 아직 젊고 사려가 깊지 못한 때일수록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육체에 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예지가 깊어짐에 따라, 자신과 온 세상의 생명의 근원이 정신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생활은 인생이라는 건물을 짓기 위한 비계와 같은 것이다. 비계가 필요한 것은 건물을 짓는 동안뿐이다. 건축이 끝나면 용도가 다하여 제거된다. 우리의 육체생활도 그와 같다. 육체는 정신적인 생활의 집을 짓기 위해서만 필요할 따름이며, 그 집이 다 지어지고 나면 육체는 폐기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보고 생각하라. 산도, 강도, 온갖 형태의 생명도, 자연이 만들어낸 것도, 모두 덧없이 지나가 버린다.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네가 그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당장 한 줄기의 빛이 나타나,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것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부처) 죽는 것은 네 자신이 아니라 네 육체이며, 사는 것은 네 육체가 아니라 육체 속의 정신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네 육체가 네 정신으로 하여금 네 생활과 전 세계의 생활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살고 있는 정신이 육체를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고, 예견하고, 네 육체와 네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