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회의원 강민정의 후원회장으로 정치후원금 모집을 책임지고 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됐다. 첫째, 교사출신, 공무원출신 국회의원은 과거의 동료선후배들한테 소액정치후원도 받지 못하도록 법이 금지한다. 공무원, 교사의 신분을 이유로, 좋아하는 국회의원한테 소액후원조차 못하게 막는 건 과잉금지의 전형이다. 법 개정이 요구된다. 둘째, 지금의 세액공제 정치후원금제도는 겉보기와 달리 정치의 부익부빈익빈을 강화하고 부익부빈익빈의 정치를 재생산하는 아주 몹쓸 제도다. 국세청 자료가 입증한다. 2018년 근로소득 상위1%는 정치후원금의 24.2%, 상위5%는 48.4%, 상위10%는 62.6%, 상위30%는 90.1%를 제공했다. 압도적이다. 반면 근로소득 하위50%는 2%, 하위70%는 9.9%를 제공했다. 보잘것없다, 종합소득 상위1%는 33.8%, 상위5%는 61.8%, 상위10%는 75.9%로 더 집중이 심하다. 소득중하위집단도 10만원까지는 전액 세액공제를 받는다. 자기부담이 전혀 없이 정치후원금을 낼 수 있지만 기회를 쓰지 않는다. 실은 고소득층도 정치후원자 비중은 5%를 넘지 않는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8년에 후원금을 한
허위를 항일지사로만 아는 사람이 많다. 항일 의병장으로 이름을 알리고,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최후를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허위는 정당정치가 도입되기 전에 ‘책임 정치’의 문화를 이 땅에 선보인 뛰어난 지도자였다. 의병항쟁이 무위로 돌아가자 한양으로 올라온 허위는 세 차례에 걸친 ‘소청운동’을 연속적으로 벌였다. 첫 번째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자는 ‘복수소청’이었고, 두 번째는 주변 열강의 침탈을 분쇄하고 내정 개혁에 필요한 ‘건의소청’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국정운영 현안에 대한 ‘광의소청’이었다. 허위는 이러한 소청운동으로 여론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황국협회에 참여하여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 대한 반대활동을 벌였다. 허위를 비롯해 황국협회의 선봉에서 근왕운동을 펼친 인물들은 을미년에 항일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세웠던 위정척사 이념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거리에서 싸우고,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허위의 경륜과 포부를 들은 고종이 부르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관직에 연연하여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조금도 유보하지 않았다. 평리원 판사와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 등의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천지의 물을 떠가서 남녘 한라산 물과 섞으려고 해요. 남북을 하나로 합치는 거지요.” “그 장한 소원 꼭 이루어지도록 저도 노력할게요. 이별 70년, 재회의 시작이군요.”
◇산동성 위해시에 사는 김일제의 후손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성씨와 가문의 계보에 대해 연구하는 보학(譜學)을 전근대적인 학문으로 격하시켰다. 그 결과 보학은 역사연구 대상에서 완전히 쫓겨나 소수 문중학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임금부터 시골유생에 이르기까지 보학을 모르면 이른바 양반행세를 할 수 없었던 조선에 비교하면 보학이야말로 일제 때 가장 강력하게 탄압받은 학문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중화사상이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중국은 보학연구가 대단히 활발하다. 중국의 성씨 중에 총씨(叢氏)가 있는데, 이들을 연구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은 씨(氏)보다 성(姓)이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데, 총성(叢姓)의 시조를 흉노왕족 김일제(金日磾)로 모시기 때문이다. 총성은 중국 북방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 숫자는 약 41만여 명으로 중국에서 233번째로 많은 성씨다. 중국의 성씨 연구자들에 따르면 총성의 연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데 가장 빠른 것은 이기씨(伊耆氏)의 후예라는 것이다. 《국명기(國名紀)》나 《성씨고략(姓氏考略)》, 《장자(莊子)》 같은 문헌사료에 의하면 요임금 시대에 숭(崇), 지(枝), 서(胥), 오(敖)라는…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꾸준히 재난지원금 전 국민 보편지급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준비된 선별적 3차재난지원금을 신속집행 하되 보편적 4차재난지원금도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의 3분의 2가 선별지원에 찬성했다는 조사결과 보도가 있었지만 경기도 조사 결과론 경기도민 3분의 2가 2차재난기본소득(전 도민에게 10만원씩 지역화폐) 지급에 찬성했다”며 “진실은 무엇일까?”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1차지원금(소멸성 지역화폐 전국민 보편지급)이 2차지원금(현금선별)보다 소득양극화 완화 및 소비활성화 효과가 더 크다면서 “소상공인들이 지역화폐 전 국민 지급을 주장하는 이유”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달 28일에도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전원에게 자신의 이런 소신을 담은 문자 메시지를 보낸바 있다. 현금으로 선별 지급한 2차 재난지원금은 지원에서 배제되거나 선별에서 탈락한 국민의 박탈감과 갈등 분열만 불러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지사는 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로 보편 지원하는 게 양극화 완화, 지역경제 활성화, 소득 지원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부와 민주당은 이번 3차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을 코로나19로…
아이 하나가 엉엉 울면서 내게 다가온다. 보통은 다른 친구가 우는 아이를 토닥이며 데리고 온다. 눈물을 쏟는 아이를 달래며 자초지정을 묻자 친구 A가 자신을 때리면서 욕했다고 말한다. 한참 성토대회를 열던 아이는 이때부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낸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고 폭력을 쓰는 건 선생님께 혼나야 하는 일이니까. 친구가 얼마나 혼날지, 내가 어떤 판결을 내려줄지 기대감이 차오른다. 막상 A를 불러서 삼자대면 해보면 나쁜 행동을 저지른 나름의 이유가 있다. B가 먼저 놀리고 도망쳤거나, B가 먼저 때렸거나, B가 예전 어느 날에 자신을 놀리면서 때렸거나. 보통은 셋 중 하나의 이유로 귀결된다. 장난치려고 먼저 때리는 경우는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욕하면서 건드리는 경우는 드물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마음 속에 남아 있다가 갑자기 행동으로 드러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상담하면서 두 아이 모두가 잘못한 점을 발견했을 때 담임교사인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 잘못의 경중을 크게 따지지 않아도 되고, 서로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 걸로 종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지만 본인들도 잘못한 점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남과 북의 흥겨웠던 시간은 어느새 백년은 지났나 싶게 아득하다. 실제 백년 전쯤으로 한번 돌아가볼까. 1898년은 “제국 아메리카의 시발점”이다. 미국은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와 필리핀을 독립시키겠다며 노쇠한 스페인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사실은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쿠바와 필리핀은 독립은커녕 졸지에 주인만 바뀐 식민지로 다시 전락했다. 1895년 청일전쟁으로 조선반도에서 중국을 몰아내고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선언했으나 조선을 식민지 비슷하게 거머쥔 일본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자 조선의 식민지화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어디 그게 일본 혼자의 힘이었던가. 러일전쟁 자체가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치러진 전쟁인데다가 태프트-카츠라 조약에 따른 거래가 깔려있지 않았는가? 그 거래라는 게 뭔지 이제는 다 안다. 필리핀의 주인은 미국이고 조선의 주인은 일본으로 하자는 거 아니던가. 미국의 이른바 아시아 태평양 체제는 이렇게 우리에게 역사적 고통을 강요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러니 미일전쟁(美日戰爭)이기도 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마무리를 한 19
디지털 이전의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가 있었다. 필름회사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디지털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가는 자리를 칩이 대체하였고 찍은 사진을 저장하게 되었다. 아나로그 필름은 한통으로 사진 24장이나 32장을 찍을 수 있었는데 디지털 저장장치는 손톱만한 크기에 수백장을 저장하고 지우고 다시 찍을 수 있어서 잘 관리하면 수년간 재활용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필름으로 큰 수익을 얻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도산위기를 맞은 것이다. 필름시절 부부 단체관광을 가면 카메라를 가진 남편들이 인기가 높았다. 오전에는 명소에서 단체사진만 찍었다. 포토뷰가 좋아도 개인사진을 찍지 않았다. 부부사진, 최소 7~8인 소그룹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필름이 비싸기 때문이고 사진을 뽑는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술 한잔을 하신 우리의 사진사 남편은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한다. 과감히 개인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풍광사진을 촬영한다. 사진사 아내는 필름값은 어찌하고 그렇게 찍어대면 다 뽑아줄 것인가 따라다니면서 따진다. 결국 사진촬영은 부부싸움으로 번지고 술취한 남편은 버스 앞자리에, 화가 난 아내는 뒷자리에 가서 몸져 눕는다.…
고립이 주는 선물 ‘밀레니얼 세대 이후 코로니얼 세대가 왔다’고 누군가 말했다. 항상 언제 어디서든 접속할 수는 있지만 늘 외로운 세대로부터, 실제로 접촉하지는 않지만 늘 소통하고 공유해야만 살아남는 세대로 넘어간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20세기 말에 온 밀레니얼 세대는 지금의 디지털 생활을 창조했다. 하지만 왕성한 스마트 소통 속에서 줄곧 원자의 고독을 느껴왔다. 그런데 코로나19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세대가 왔다. ‘팬데믹’이라고 부르는 감염의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는, 고립될 수밖에 없지만 더욱 공감을 위해 노력하는 콜로니얼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21세기가 시작 될 무렵부터 20여 년 간,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창의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미레니엄 이후 세대들의 활약을 보아왔다. 서구에서는 X세대 다음으로 찾아온 N세대들이 청년기에 그 주역을 담당하였다. 한국사회에서는 호황의 꽃에 해당하는 1990년대 신세대, 혹은 ‘서태지 세대’라는 존재들 다음에 그런 존재가 등장했다. IMF 이후 세대, 혹은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불황의 꽃들로서, 경기침체 속에 세상에 나간 21tpl의 청년들은 적어도 사이버 세상에서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