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상은 무엇일까? 지난 8월 초, 정부는 창조경제의 핵심인 창의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창의인재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개개인의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을 확대하기 위해 학교를 창의성 발현의 산실로 조성하고, 학교 내에서 상상력과 체험, 탐구교육의 활성화를 추진하며, 과학기술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발굴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새 정부가 내건 ‘창조경제’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창의인재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을 하는 분위기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을 강요해 왔다.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은 새로운 혁신적 아이디어가 아니었고, 우리는 그저 미국이나 일본이 먼저 간 길을 열심히 따라가면 되었다. 창조성 있는 별종보다는 성실한 인재가 더 대우를 받았고, 정답을 잘 맞히는 모범적인 학생들을 키우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목표였다. 이를 반증하듯 예나 지금이나 교실과 강의실의 학생들은 여전히 정답만을 신봉한다. 틀리는 것을 실패라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결국 이러한 정답의 신봉 신화가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가로막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아이돌 가수나 연예인을 이야기한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물어보면 공무원과 회사원을 대답한다. 공부 좀 하는 옆집 엄친아에게 물어보면 의사나 변호사, 금융전문가를 말한다. 결국 꿈이 ‘표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 수가 수백이어도 꿈은 채 열 손가락에도 꼽히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안정만을 추구하고, 새로운 창조적 도전엔 머뭇거린다. 인생에 정답은 없고 여러 개의 해답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직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태가 젊은이들만의 책임일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그동안 젊은이들이 이상을 품는 걸 허락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별종 혹은 변종이 되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변종은 사회라는 플랫폼에서 다른 부품과 짝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 고장을 일으키기 십상이어서 부품으로 쓸 수가 없다.
별종은 생긴 모양새가 이상하거나 별난 짓만을 골라 하는 이들이 아니다. 진정한 별종은 남들과 다른 꿈을 꾸는 이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른 꿈을 꾸면 별종 취급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스밀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패거리문화의 탓도 있겠지만, 분석적으로 살펴보자면 경제 구조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산업화 시대 초기에는 생산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재상도 대량 생산 설비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에 맞춰졌다. 기존 제품을 효율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 아래 각자 맡은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유능한 인재였다. 그러나 21세기는 이미 존재하는 것만을 잘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하는 시대이기에, 자기 일을 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자율적인 창조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인물형이 바로 별종이고 창의인재다.
세계적인 발명가 토머스 앨버 에디슨이나 21세기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천재적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당대의 상식과 가치의 관점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별종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꿈을 위해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스스로를 시험했다. 이들은 기존 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꿈과 끼를 가지고 새로운 가치와 존재를 찾고자 한 별종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말로 바꾸자면 이들이 바로 창의인재인 셈이다.
남과 같은 꿈을 꾸지 않고 자신의 진짜 꿈을 꾸는 사람만이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꿈은 사회적 교환가치로 치환되는 직업이나 물건이 아니라 순정한 이상(理想)에서 출발한다. 남아프리카 민주화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는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고 했다. 아직 청춘인데 벌써 힐링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 성공을 하고 싶다면,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남과 똑같은 꿈을 꾸지 말고, 균일화되고 공정화된 가짜 꿈을 좇지 말고, 우직하게 자신의 꿈을 찾아 만들어가는 별종이 되기 바란다. 도전은 주인공이 되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