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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적선(積善)과 강탈(强奪)

 

양평 용문산 자락에 뿌리를 내린 천년 거목(巨木),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 표지판 기록에 의하면 1100~1500년 된 오래된 나무다. 아직도 정정한 청춘을 자랑한다. 새치처럼 군데군데 노랑 잎이 보이지만, 파란 잎 사이로 은행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100살 넘기기 어려운 유한한 인생이 천년의 나무 앞에서 한참을 명상에 잠긴다. 경건함에 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우리 일행은 용문산 등산 후 하산하여 시냇가에 잠시 쉬고 있었다. 은행이 여물어가고 산밤이 툭툭 떨어지는 가을, 물은 맑고 시원했다. 배낭에 가져온 사과 몇 조각을 꺼내서 일행과 함께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엄지손가락만한 말벌이 윙 날아들었다. 둬 서너 번 빙빙 날더니 비닐봉지에 담긴 사과조각으로 육탄 돌진하여 먹고 있다. 불청객이다.

일행은 몸을 움츠리며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추석명절 앞두고 벌초하러 갔다가 말벌에 쏘여서 쇼크사 한 뉴스가 스쳐지나갔다. 어제 우리 모임 회원이 말벌에 쏘여서 응급조치로 약을 먹고 급히 병원에서 해독 주사를 맞고서야 회복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약간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망설이고 있는데, 그 놈이 다시 이륙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을 기운차게 시위한다. 우리는 얼른 자리를 피하였다. 대여섯 번을 빙빙 날더니 역시 그 사과 있는 봉지 안으로 쏙 들어갔다. ‘허허, 요놈 봐라’ 잠잠했던 나의 공격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멀찌감치 물러났다.

이 말벌을 보는 순간 등산로 입구에서 ‘귀신상담’한다는 팻말을 붙이고 좌판을 벌인 수염 긴 도사차림의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떠올랐다. 신은 믿지 않고 자신과 육신을 믿는다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말벌과의 긴장된 대치 상태에서 그 사람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장난기가 발동하여 깔판 스펀지로 사과를 먹고 있는 말벌을 내리쳤다. 그러나 빗맞았다. 냅다 용트림한다. 나를 공격한다. 그 스펀지로 막아내었다. 아주 공격이 날카롭고 날렵했다.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얼른 사과든 봉지로 접근했는데, 이번엔 두 마리가 왱왱 거렸다. 사과 구출을 멈췄다. 두 마리가 달려드니 일행들은 아주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냥 적선(積善)했다 치고 놔두라고 한다. ‘그래 적선이다. 독 오른 말벌에게’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나의 뇌리 속에서는 ‘강탈당했다’였다. 말벌조폭에 그만 항복했는데, 그것이 어찌 적선이란 말인가? 그러나 기분은 한결 좋았다. 사과조각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나’와 ‘말벌’의 먹이쟁탈전. 나의 비겁한 양보로 전투는 봉합되었다.

하산하여 다시금 허름한 도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여러 가지 차려놓은 운명도표 위로 누구의 애완견인지 뛰어다니고 있고. 그는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졸고 있다. 또 다른 의미의 적선과 구걸행위. ‘땀 흘려 일하며 살 일이지….’ 그러나 그가 가여워지고, 달콤한 향기를 찾아 사람 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다니는 말벌도 가엾다. 그렇다면 나도 어쩌면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고려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경기예총 2012년 빛낸 예술인상 수상 ▲한광여중 국어교사 ▲전 (사)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 지부장 ▲시집-『카프카의 슬픔』(시문학사·1992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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