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레아와의 사이에 여러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두려웠다. 장성하면서 자신과 같이 반기를 들까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모두 삼켜 버린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레아는 제우스를 임신하자 크레타 섬으로 도피해 그를 낳고 요정들에게 의뢰해 크로노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성장시킨다.
훗날 장성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와 싸워 이기고 그가 삼킨 형제들을 모두 토하게 해 살려낸다. 제우스가 이 싸움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사용한 기술이 바로 오늘날 레슬링 기술의 원조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픽 여러 종목 중 레슬링 우승자를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한 것도 이런 제우스의 싸움기술을 겨루는 경기여서다.
레슬링은 고대 올림픽 때부터 3천년 가까이 이어져온 올림픽의 상징적인 종목이다. 근대올림픽에서도 2회 대회를 제외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린 몇 안 되는 종목이다. 우리에게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단 양정모 선수가 최초로 금메달을 딴 감격의 종목이기도 하다.
이런 레슬링이 올해 초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퇴출당하는 위기를 맞았다. 경기가 재미없고 지루한 데다 판정 논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인들도 충격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7개월 지난 어제(9일) IOC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제125차 총회에서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의 마지막 정식종목으로 다시 레슬링이 선정됐다. 기사회생한 것이다.
레슬링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국제레슬링연맹 라로비치 회장이다. 올 2월 지휘봉을 잡자마자 6개월 동안 숨 가쁘게 세계레슬링계 개혁을 추진, IOC의 마음을 되돌려 놓았다는 것이다. 거대한 체구지만 직접 레슬링 매트에 서 본 일이 없는 비경기인 출신의 세르비아인 라노비치 회장의 직업은 샴푸공장 사장. 아들의 레슬링코치였으며 어린 시절 친구의 간곡한 부탁으로 세르비아협회장을 맡으면서 세계 레슬링계에 발을 들였다는 라노비치 회장은 국제연맹이사 경력 6년차다. 그가 지금 3천년에 이르는 레슬링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위기를 돌파한 구원자로 그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