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추분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올 한 해가 초침처럼 숨 가쁘게 달려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시침처럼 여유 있고 느린 보폭으로 가는 것처럼 살기도 하지만 결국 다 같은 날에 추분을 맞는다. 추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이며 추분이 지나면서 밤이 조금씩 길어져 동지에 밤이 가장 길다고 상식으로 알고 있다.
옛 선조들은 추분의 세 가지 징후를 들어 계절의 변화를 가르친다. 첫째 뇌성 소리가 들리지 않고, 둘째 겨울잠을 자는 벌레들이 흙벽을 뚫고 집안으로 들어오며, 셋째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여름을 폭우와 천둥 번개에 시달린 우리는 한 송이 국화꽃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우선 조용해진 날씨와 선들해지는 기온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푸르름을 뽐내며 뻗어갈 것만 같았던 나뭇잎이나 풀잎들이 마치 가을 이슬에 탈색제라도 들어있는 것인 양 희미하게 빛을 잃어 가고 있다. 그렇지만 장마 끝에 병이 돈다고 걱정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고추밭에서는 연일 빨갛게 익은 고추를 쏟아내고 지붕 위에 널려 하루하루 쏟아지는 가을볕에 유리알처럼 마른다. 하기야 그동안 습기에 골머리를 앓던 우리 집에서도 빨래를 널면 한나절도 못가 강정같이 마른다. 그 바람에 틈만 나면 이부자리를 너시면서 저절로 신이 나시는 어머니를 보며 슬쩍 일거리를 만들어 드리기도 한다. 미처 다 먹지 못하는 가지를 쪼개 세탁소 옷걸이에 걸쳐 널면서 풋고추도 쪼개 밀가루 버무려 쪄 말리면 좋다고 부추기고 있자니 마실 오신 친구분은 덩달아 맞장구를 치신다.
뒤늦게 심은 방울토마토가 하염없이 키를 키우더니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열매를 달고 미처 자라지도 못하고 익어간다. 오이 덩굴에서도 조금 자라는 듯하더니 바로 늙기 시작하고 호박도 자라다 말고 쇠어 조그만 몸에도 제법 단단한 씨로 가득하다. 식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리가 내리기 전에 씨를 여물게 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뿐이 아니라 미물들도 추위가 오기 전에 그 중 아늑한 가지에 기대 집을 짓고 들어 앉아 알을 낳을 준비로 가을 볕 속에서 날개를 접을 것이다. 영영 집을 갖지 못하는 미물도 열매가 익기를 기다리며 겨울을 지낼 거처를 마련하는 계절도 바로 요즘이다.
한 쪽이 실하면 한 쪽이 쇠하는 게 세상 이치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부부가 사는 이치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고 보면 틀림이 없겠다. 지난 한가위에 긴 연휴로 북적 거릴 때에도 내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겠지만- 남편은 형제들과 술잔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는 걸로 지나간다고 해도 모두가 자신의 둥지로 떠나가고 썰렁해진 시간에 고단한 다리를 뻗으며 한숨이 나가기는 매한가지라 측은지심마저 든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게 되는 수고와 역할을 두고 경계를 지을 수도 없거니와 지나고 보면 다 그 안에 서로 어울려 있음을 보면 우주의 조화에 저절로 숙연해지고 나날이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조금씩 늙어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오늘이 새삼 고맙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 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