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 첫날, 국내 일간지들의 헤드라인 키워드는 한결같이 ‘저항’과 ‘불통’이었다. <靑·野, 추석상에 ‘국민 저항’ 올려놓다> <박 대통령-김한길 대표, 서로 “국민저항 부딪힐 것”> <박 “장외투쟁, 국민 저항 부딪힐 것”, 김 “불통정치, 국민 저항 부딪힐 것”>. 민족 최대의 명절을 앞두고 TV뉴스와 신문기사를 접한 국민들의 심정은 안타깝고 불편했다.
이 자리에서 누구의 입장에 편을 들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논쟁과 대화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논쟁은 자신만의 정교한 논리와 방대한 지식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논쟁의 진정한 능력과 자세는 상대의 설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명쾌한 논리로 상대가 입 한번 뻥긋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논쟁이나 토론의 승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의 결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 분노는 더욱 커지다가 언젠가 폭발하여 다시금 갈등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현실처럼 말이다. 절대적 진리는 항상 억압을 낳는다. 하지만 진정한 진리는 대화와 합의 속에서 나온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논쟁과 대화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유대인 속담에 ‘말이 없는 아이는 배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유대인 엄마는 아이를 키울 때 언어교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정성을 쏟는다. 아이가 아무리 심한 억지를 써도 엄마는 대화와 설명을 통해 아이를 설득시킨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오히려 답답해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스라엘 부모들은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만들고 그런 유연성을 통해 창의적인 능력과 논리성을 키워준다. 아이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쳐주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아이가 왜 그것이 옳고, 무엇 때문에 그른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대화를 통해 지성과 인성을 함께 전달한다. 많이들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아이와 탈무드 식 대화를 즐기는데 이때에도 나름의 순서가 있다. 우선 아이의 말을 경청해서 심리 상태를 파악한 후 부모가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 후에 토론과 논쟁이 이어지고 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아이에 대한 교육법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며 의견을 나누고 조율해야 하는 인간관계의 진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선 내 말을 들어줘. 그러면 당신이 하는 말을 들어줄게”라며 상대보다 먼저 이야기 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마음은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우선 내 말을 들어 달라’고 끝없이 강요한다. 하지만 프란체스코회 창립자인 성 프란체스코는 “자신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우선 상대방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억압과 지배가 없는 사회, 해방된 인류를 꿈꾸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대화와 의사소통이 필요하며 이것이 결국 세계를 변혁시킬 수있는 원리가 된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대화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먼저 서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고, 그 내용이 참이어야 하며, 상대방이 성실히 지킬 것을 믿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평등하고 수평적이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이루어진 토론과 대화에서만 서로가 합리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렇지 못한 대화, 혹은 논쟁과 토론은 그저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내 정치 현실이나 멀리 지구촌의 경우를 보더라도, 현대는 끊임없이 분쟁이 이는 싸움판과 같다. 하지만 전쟁으로 점철된 세계사를 보면 알 수 있듯, 힘으로 상대를 짓누른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합리적 이성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다.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해결책은 힘이 아니라 대화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