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해외로 유출된 우리나라의 문화재 환수 운동을 하는 혜문 스님을 만났습니다. 미국에 있던 정순왕후 어보 환수 약속을 받는 쾌거를 이루고, 일본에 유입된 조선 왕의 갑옷과 투구를 공개하도록 압박해서 동경박물관에 전시하게 하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사실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한 스님과 ‘문화재제자리찾기’가 해낸 것입니다. 정부의 무관심에 화가 나지만 그나마 민간단체에서 그런 일을 해낸 것이 장하기도 합니다.
정순왕후 어보 환수 작업에 참여했던 안민석 국회의원, 김준혁 교수(경희대) 등 100인 대표들이 자축하는 자리에서 혜문 스님이 하신 말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요즘이나 옛날이나 공부하는 목적이 과거에 합격하거나, 좋은 대학에 가서 신분 상승을 기대하거나,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인데, 왕을 이을 세자 교육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세자는 더 많은 돈을 벌거나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나 신분 상승을 위해 공부할 까닭이 없지요. 자연히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세자 교육의 중요한 일부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법’, ‘최고와 최고 아닌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물만이 아니라 사람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길렀다는 것입니다. 충신인지 간신인지, 믿을만한 사람인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일을 맡길만한 사람인지 맡겨서는 안 될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있듯이 사람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니, 판단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어서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뒤통수를 맞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압니다.
왕이 될 세자는 ‘최고’와 ‘최고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 왕의 선물이나 다른 나라 왕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은 소유할 수 있으나 그 외의 다른 것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랫사람이나 백성이 가진 것을 탐내거나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지요. 힘없는 민중을 짓밟고 수탈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왕은 이미 그 존재로서 최고이기 때문에 소유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최고의 것을 경험하거나 소유한 사람이 최고 아닌 것을 시시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최고의 오디오에 귀가 익숙한 사람이 값싼 기계 소리를 견디기 어렵거나, 최고의 자동차를 타본 사람이 그 수준 이하의 차에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과도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탐심을 절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체제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뿌리 깊게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라는 책을 함께 쓴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그의 아들 철학자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무한한 소유가 인간의 좋은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가 좋은 삶의 기본재인 것을 동서양의 역사와 지혜의 전통을 근거로 입증합니다. 그러나 탐욕에서 비롯된 지구적 차원의 경제위기와 기후재난, 온갖 반인륜적 범죄들을 보면 스키델스키 부자의 주장이 헛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지는 지구 종말의 징후들은 인간이 행복의 기본재를 다시 생각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아니 불안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복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찾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진짜 행복한 삶이고 무엇이 가짜 행복한 삶인지, 어떤 삶이 최고의 삶인지, 아닌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남은 삶,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진짜 최고의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