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버지
/이사라
아버지는, 어머니와 한 짝이었던
그 아버지는
그 가을 어머니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은
그 아버지 아닌 아버지를 느린 호흡으로
새긴다
새 낱말을 씹듯
새 날들의 밥알을 씹으며
아버지가
홀로 새 세상을 지나간다
가족사진 한가운데에서
기억 언저리로
천천히 몸을 옮기는 아버지
새벽은 늘 오고
밤새 홀로 새기는 묘비명이 희미한 날들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아버지다
- 이사라 시집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기억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란 또 얼마나 소중한가.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이란 행복을 켜켜이 쌓아두는 집을 만드는 일이다. 오래도록 서로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그물망을 짓는 일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헤어진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날들이다. 하나의 조각처럼 편편이 남아있는 기억들이다. 비록 곁을 떠났지만 가족사진 한가운데 자리한 모습처럼 내 안에 뚜렷이 남아있는 아버지. 세상이 그 아버지 아닌 아버지를 느린 호흡으로 새기고, 새 낱말을 씹듯 새 날들의 밥알을 씹으며 아버지가 홀로 새 세상을 지나가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어머니와 한 짝이었던 그 아버지다. 하여, 우리가 살아생전 함께하는 시간이란 당신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발자국이다./서정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