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잔
/김유선
한 잔의 물을 건네받고 들여다보면
그가 거기 있다
그도 목마른 채 건네준 물 한 잔
나도 누구에게 물 한 잔이 되기 위해
흐르고 굴러 여기까지 왔건만
한 잔의 물로 그를 꽃피운 적 없다
꽃보다 향기로운 물 한 잔인 적 없었으니
물에서 ㄹ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무가 되고
ㄹ은 유음, 흘러야 물인데
흐르지 않으면 참물이 아닌데
지구의 종말이 물바다이면
지금 그 많은 참물은 어디 숨은 걸까
너무 건조해 가습기를 켜며
내가 나에게 건네는 차 한 잔.
- 김유선(1950~2019) 시집 ‘은유의 물’
우리들의 후회와 한숨, 자책과 반성은 결국 한 잔의 물 같은 사랑으로 타인을 한번도 꽃피우게 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물처럼 나에게서 타인에게 흘러들지 못하는 ‘참물’이 되지 못하여서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꽃을 위한 한 잔의 물이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지만, 물에서 ㄹ을 뺀 아무것도 없는 무(無)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에게 흘러들어갈 한 잔의 물은커녕 나 자신이 너무 건조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김명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