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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장안문(長安門)의 유래와 의미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北門)이자 정문(正門)이다. 주로 정문은 남문이 되는데 예기(禮記) 명당(明堂) 편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천자부부의남향이립(天子負斧依南鄕而立)’ 즉, 천자는 병풍을 뒤로하고 남쪽을 향해 선다고 하여 군자남면(君子南面)이 일반화 됐다.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근정전과 광화문은 남향하고 이에 따라 한양도성의 남문인 숭례문이 도성의 정문이 됐다. 수원화성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남문을 북문 보다 우선시했으나 혜경궁 행차 때 처음 수원에 도착해 만나는 문이 북문이기 때문에 정조는 북문을 정문으로 정하고 ‘장안문’이라는 별호(別號)를 내렸다.

장안(長安)이란 ‘크게 안전한 곳’이라는 뜻과 ‘이상 도시(ideal city, 理想 都市)’라는 의미가 있다. 장안은 중국 한(漢)나라, 당(唐)나라의 수도로서 도시 중 최고라는 상징성도 있기에 한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많이 사용해 왔다. 장안을 수도로 정한 곳은 고구려로 ‘장안성(586~668년, 평양성)’이라 하고, 신라 ‘서라벌’과 조선 ‘한양’도 별칭으로 ‘장안’이라 불렸다. 이처럼 장안은 수도, 즉 서울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됐고, 또 나라 이름을 장안이라 부르기도 했다. 통일신라 때 왕위계승에서 패배한 김헌창이 822년에 난을 일으키고 세운 나라도 장안국(長安國, 후백제 지역)이다. 현재도 전국에 장안이란 지명을 가진 곳이 많다.

정조가 수원화성의 정문을 장안문이라고 한 것은 중국 역사와 관계가 깊다. 중국을 처음으로 천하 통일한 것은 진(秦)나라지만, 두 번째로 천하 통일을 이룬 것은 한(漢)나라로 그 수도가 바로 장안(현 西安)이었다. 한나라는 유교 국가의 틀을 세우고 한자(漢字), 한족(漢族)이란 말을 만들어냈듯이 이후 중국의 근간이 됐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 B.C. 247~B.C. 195)은 패군(沛郡) 풍현 출신으로 의병 활동 때 패현(沛縣) 관아의 수령으로 추대돼 패공(沛公)으로 불렸다. 이후 중국에서 풍패는 황제의 고향을 지칭하게 되고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조선도 영향을 받아 태조의 고향을 풍패라 했다. 이성계의 관향(貫鄕, 시조의 고향)은 전주(全州)이고 태어난 고향은 함흥(咸興)이어서 두 곳 모두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했다. 그래서 전주 객사를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하고 있다.

황제가 된 유방은 장안(長安)을 수도로 삼고 아버지 유태공을 황궁으로 모셔 호화롭게 살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간이 지나자 고향을 그리워하여 슬픔이 가득했다. 유방은 아버지를 위해 장안 근처 여읍(驪邑)에 고향 풍읍과 똑같은 마을을 짓고 신풍이라 했다. 이곳에 모든 고향 사람들과 기르던 가축까지 옮겨 살게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눈을 감고도 집을 찾아오고 닭과 개들까지도 찾아올 정도로 똑같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유태공은 행복하게 지냈다고 한다.

정조는 아버지가 묻힌 수원 성역화의 일환으로 도시와 중요 건물의 이름을 중국 황실에서 따왔다. 그 시작은 구읍치가 있던 화산(花山)을 화산(華山)으로 바꾸는 것부터 비롯됐다. 화산(華山)은 중국의 진산(鎭山)으로 지금도 중국을 상징하며,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화(華)’는 화산(華山)을 의미한다.

수원화성의 활성화를 위해 과거시험을 자주 치렀는데, 1794년 12월 8일 시험문제는 신풍에 관한 것이었다. 한나라 신풍의 노인과 닭 및 개가 자기 집을 기억하는 것을 내용으로 표문을 지으라는 것과 신풍이 옛 풍읍과 같음을 시로 지으라는 문제 등이 출제됐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에 가기 직전 1795년 2월 22일 행궁의 정문인 진남문을 신풍루로, 북문을 장안문이라 이름을 고쳐 지었다. 중국의 지명을 차용한 것은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문화적 사대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기보다, 조선이 더 이상 ‘전주 이씨’가 아닌 ‘수원 이씨’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실이 시작됐음을 알리려 한 정조의 의지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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