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00년 전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중국 화룡현 백운평에서 대한독립군은 일본군과 대격전을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대한독립군은 일본군 아즈마지대의 병력 수백 명을 섬멸하고 소총 240정을 노획했다. 완루구 전투와 천보산 전투에서도 연전연승했다. 어랑촌에서는 기병 1개 연대와 보병 1개 대대가 연합한 일본군 1천5백여 명과 격돌, 대승을 거두었다. 고동하곡 전투에서는 심야에 적 2개소대를 습격해서 섬멸했다.
100년 전에 거둔 이 승전이 바로 항일무장투쟁사를 빛낸 청산리전투다.
청산리 전투의 출발점은 그해 6월 7일 벌어진 봉오동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는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불의의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우리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해 최정예부대를 투입했고, 북만주의 항일무장투쟁세력들은 연합해서 일본군에 항전했다. 결과는 동아시아를 놀라게 한 우리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첫 승리로 기록되는 봉오동 전투를 이끈 지도자였다. 김좌진의 부대와 연합해서 청산리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것도 홍범도였다. 하지만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최초의 승전과 최대의 승전을 모두 이끌었던 홍범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최후를 마쳤는지, 지금 그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이것은 온전한 나라가 제 나라를 지켜낸 영웅을 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이순신 이후 구국항전에서 최고의 성과를 남긴 홍범도는 왜 우리 역사의 변방으로 이토록 오랫동안 밀려나 있었을까. 비운에 찬 그의 삶과 운명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10여 년 넘게 그의 삶을 추적했다. 자료를 뒤지고,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만주와 중앙아시아를 답사하면서 아직도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나는 수없이 절감했다. 나라는, 역사가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문학은 또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독립국가의 초석이 되어야 할 이토록 중요한 인물을 역사가 놓치고, 우리의 근대사를 가장 파란만장하게 종단한 문제적 인간을 문학마저 놓쳐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문학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이 아무런 기억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사라지지 않게 기록하고, 기억하는 예술이다. 그것은 모국어를 다루는 작가들의 소명이기도 하다.
일본군에 밀려 연해주로 퇴각해서 와신상담하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벼르던 홍범도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이 1937년 10월이다. 아시아 피압박민족이 전개한 반제국주의 투쟁의 영웅으로 레닌에게 모젤 권총과 금화 100루블의 상을 받았던 그는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이 되었고, 크질오르다로의 극장수위로 쓸쓸하게 최후를 마쳤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대한독립군 대장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일본의 동맹국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는 73세의 나이로 입대를 신청했다. 독립전쟁과정에서 아내와 자식을 모두 잃은 그는 아직도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했다.
역사가 그를 제 자리에 복원시키고, 문학과 예술이 그의 삶과 죽음을 우리의 기억 안에 되살려낼 때가 되었다.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의 10월이다. 언제까지 그를 기억하는 작업을 그가 수위로 일했던 ‘고려극장’에게만 맡겨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