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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남성주의의 파산, 여성(들)의 복수가 시작된다

⑥ 프라미싱 영 우먼 - 에머랄드 펜넬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제목대로라면 전도가 양양한 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 곧 학계나 비즈니스 쪽에서 꽤나 잘 나가고 있는, 성공 스토리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일종의 엽기 스릴러인데다 이야기가 완전히 예측불가능한 쪽으로 움직인다. 매우 새로운 영화이다. 여성감독의 영화이고 여성이 주인공이며, 여성 문제가 앞세워진, 파격적인 페미니스트 영화다. 요즘엔 영화고 어디고 여성이 대세다. 여성주의가 시대를 주도한다. 남성이 주도하던 시대가 파산했음을 보여주고 폐기돼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인공인 카산드라는 낮과 밤이 다른 여자이다. 낮에는 친구 게일(래번 콕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점원으로 일을 한다. 꽤나 외모가 눈에 띈다. 그래서 카페 점원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집도 꽤 잘 사는 편 정도가 아니라 부유한 편이다. 먹고 살 걱정은 없어 보인다. 아빠는 내색하는 편이 아니지만 적어도 엄마는 늘 카산드라가 걱정이다. 딸이 너무 허송세월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낮에는 설렁설렁 무위도식하듯 살아가는 카산드라는 알고 보니 7년 전에는 아주 똑똑한 의대생이었다. 우리 식으로는 예과 2년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때려치웠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걸 다 그만두고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산다. 대체로 허무주의에 빠져 있으며 흥미를 갖는 것이 없다. 공부도 싫고 친구도 별로고 남자가 필요하지도 않다. 미래계획이 없다.

 

그런데 이 여인 밤마다 술집에서 진탕 취한 척 한다. 옷이란 옷은 다 풀어 헤치고 치마 속은 다 보여 주면서 술집 남자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친절한 척, 늘 취한 여자를 어떻게 해 보려는 남자를 ‘낚아서는’ 그 남자로 하여금 된통 일을 치르게 한다. ‘밤의 카산드라’는 주로 취한 여자를 대상으로 강제로 추행하거나 강간하려는 남자들을 죽이거나 적어도 거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여자처럼 군다. 그녀는 밤의 살인마인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카산드라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보이며 매우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일종의 ‘범행 수첩’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횟수를 의미하는 작대기가 수십 개나 그려져 있다. 카산드라는 아마도 7년 전에, 그러니까 의대 시절에 남자들에게 ‘무슨 일’을 당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아 이 여자는 복수를 꿈꾸고 있구나’하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적어도 영화의 첫 장면, 그러니까 흐느적거리고 질펀한 바(bar)에서 남자의 손에 이끌려 간 카산드라가 그 남자

를 ‘처단하는 듯’한 시퀀스는 이 영화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남자들에게 유린당한 여자(들)의 복수극은 할리우드에서는 한 장르를 차지할 만큼 ‘무지하게’ 많이 만들어져 온 내용들이다. 아벨 페라라의 1981년작 ‘복수의 립스틱, Ms. 45’이 대표격 영화로 늘 거론되는 작품이다. 강간당한 여자가, 거리의 모든 남성들, 불량배들을 향해 45구경 권총을 겨눈다. 닐 조단이 만들고 조디 포스터가 나와 화제를 모았던 2007년 영화 ‘브레이브 원, The brave one’도 같은 경향성의 작품이다.

 

이런류 영화의 원조 격으로 기억되지만 이상하게도 한동안 음성적인 비디오로 유통된 작품으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I spit on your grave’가 있다. 1978년에 나온 1편은 B급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한 여성적 저항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지만 이후 2편, 3편 등 리메이크가 거듭되면서 자극적인 ‘강간의 스펙터클’만이 담겨진, 비교적 ‘쓰레기’ 작품들로 이어졌다. 이 영화가 여성주의 담론의 영화에서 제외된 것은 그 때문이다. 프랑스 영화 ‘베즈 무아 : 거친 그녀들, Rape me’이 의도적으로 아예 하드코어 포르노물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 전문가들도 보고 있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이번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처럼 ‘낮과 밤이 다른’ 여자의 컨셉은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숨겨진 영화인, 켄 러셀 감독의 1984년작 ‘크라임 오브 패션, Crime of passion’의 이야기 구조를 더 많이 닮아 있다는 착시를 준다. 히치콕의 전설적인 영화 ‘사이코, Psyco’의 배우 안소니 퍼킨스가 나오고 낮에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밤에는 창녀로 살아가는 여자로 ‘보디 히트, Body Heat, 1981’의 캐서린 터너가 나온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레퍼런스를 가져 온 이야기 구조로서 그것의 여성판 서사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프라미싱 영 우먼’이 단지 그렇게 예전 영화의 여러 요소들만을 차용해서 짜깁기 한 영화라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지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에만 4개나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그만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는 것인데 일단 이 영화를 만든 에머랄드 펜넬은 감독보다는 배우이다. 그녀는 이번 영화로 세계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주연을 맡은 캐리 멀리건은 지금껏 나왔던 모든 영화에서의 자기 이미지를 완전히 전복시켰으며 올해의 LA비평가협회는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해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무엇보다 스타일과 미술, 패션, 음악에서 이전 작품들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초현대적이다. 최신이면서도 초월적으로 다른 경지에 다다른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이야기의 예측 불가능성이야 말로 이번 영화가 갖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특징이다. 도무지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어느 방향으로 튈지 예상하기가 어렵다.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의 후반부와 그 결론에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남자의 결혼 전 총각파티에 짙은 화장과 가발을 쓴 채 짧은 간호사 제복(그것도 라텍스 재질의)을 입고 복수극을 벌이려는 카산드라의 계획과 그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극 후반을 한마디로 폭풍처럼 몰아치게 한다. 그녀는, 그리고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럴 수가’라는 표정을 짓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복수의 립스틱’ ‘브레이브 원’ 등등의 영화는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일종의 여성 자경단(自警團)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주체가 되긴 했어도 복수의 방식은 전형적으로 남성적 방식이었다는 얘기다. 여성 창의적인 작품들은 아니었다. 남성 자경단 영화로는 그 옛날 찰스 브론슨 주연의 시리즈물로 만들어졌던 ‘데스 위시’같은 작품을 말한다.

 

‘프라미싱 영 우먼’의 카산드라는 목적이 보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여성형을 보여

주려는 측면이 강하다. 복수의 목표가 꼭 남성 중심의 사회를 바꾸겠다는 식의 거대담론을 취하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죽은 친구에 대한 복수이다. 남성들에 대한 응징도 매우 혁신적이다. 예컨대 ‘밤의 창녀’로 술집에서 낚은 남자들은 그녀에게 직접 복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복수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카산드라는 이들 남자의 ‘약점’을 잡아(대부분 유부남이거나 사회적으로 자신의 비행이 알려지면 안되는 남자들이다.) 다른 남자를 처단하거나 응징하는 데 이용한다. 강제 청부행위를 시키는 셈이다. 자신은 범행 뒤에 숨을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이 취하려는 궁극의 복수극을 위해 단계별로 하나하나 일을 도모해 나가는 치밀함을 선보인다. 계산적이고 효율적이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카산드라는 틀에 박힌 행동을 삼가한다. 가능하면 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엄숙한 표정은 혼자 있을 때만 지으려고 한다. 카산드라는 지금까지의 여성 복수극 영화에서 가장 발랄하고 섹시한 캐릭터이다. 카산드라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위험한 경계의 삶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그녀의 목적에 흔쾌히 동의하게 만든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겉으로는 매우 脫정치적이지만 꽤나 정치성이 강한 작품이다. 광범위한 여성적 연대를 ‘획책’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영화의 결말에 동의하게 될까.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고민 끝에, 도덕적이면서도 제도권적인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결론은 남녀간에, 사람들간에 꽤나 논쟁을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여성주의 문제로 논쟁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다. 영화가 주목을 받을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그러기에 충분한 영화이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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