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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의 관규추지(管窺錐指))] 초인은 없다

 

 

1. 영화 ‘왓 위민 원트’는 할리우드가 허용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최대치가 아닐까. 주인공인 멜 깁슨은 여자를 아주 우습게 아는 남성우월주의자인데, 새로 온 여성 상사에게 밀려난다. 어쩌다 초능력이 생겨서 여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초능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자기에게 늘 쌀쌀맞게 굴던 식당 종업원을 홀려 하룻밤을 보내기도 한다. 꿈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뒤로 연락도 않던 퇴근길, 그에게 바람맞았다고 생각한 마리사 토메이가 길을 막아서고 묻는다.

 

너 게이지? 게이가 아니라면 그렇게 멋진 밤을 보내고 어떻게 이렇게 연락 두절하고 잠수 탈 수 있어? 게이 맞지?

 

그녀의 마음을 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멜 깁슨은 그렇다, 나는 게이라고 말한다. 여자 마음을 읽게 된 뒤로 그가 변했다는 유쾌한 증거로 웃어넘기면 그만이다만, 사실 양성평등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변혁은 가진 자의 자각과 양보로 이뤄진 적이 없다. 변화는 언제나 제도가 바뀌고, 법으로 보장되며, 지키지 않으면 처벌당하는 강제 규정이 마련된 뒤에야 더디게 온다.

 

2. 코로나 시국 이후로 우리나라가 알고 보니 세계적인 모범국가이고 선진국이더란 보도가 잇따른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의 무역보복을 민관이 합심해서 초단기간에 극복한 것은 쾌거라 할만 했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떨까. 민주적인 정권 교체를 세 번이나 경험했으니 정치도 선진국 수준인가. 일 년 뒤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데, 그 후보들에 대한 보도와 논의를 보고 있자면, 아직 멀었다 싶다. 윤석열과 이재명, 이낙연이란 후보가 우리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줄 초인일 리가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하늘에서 백마를 타고 내려온 초인이 이 세상을 단번에 광정(匡定)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전근대에 머물고 있다. 대통령에게 큰 권한이 주어진 것은 맞지만, 누구를 뽑아도 사회 변혁은 그들 몫이 아니다. 그들을 필두로 우리가 직접 해낼 일이다. 시민사회란 철인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LH 사태에 분노하면서 국토부 장관 변창흠의 자진사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변창흠을 장관으로 뽑을 수밖에 없는 빈약한 인재풀이 우리가 가진 진짜 실력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남자가 여자를 달래려고 자기가 게이라고 말하는 것에 속아선 안 된다. 어쩌다 초능력이 생겨서 너를 꼬실 수 있었어.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해야지, 거짓말로 다른 거짓을 덮을 수 없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적폐와 그릇된 관행, 불평등과 비민주는 짧게 봐도 일제 이후 백 년 동안 쌓인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일거에 사라질 수 없다. 그 사실에 동의해야 한국사회는 변혁으로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정치판에도 그 어디에도 초인은 없다. 아직 가진 거라곤 두 주먹이 전부인 우리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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