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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고려 강역은 한반도의 2/3인가?

고려 강역 이야기①

 

 

국사교과서와 김종서

 

필자는 중·고교 시절 국사교과서에서 고려의 강역을 묘사한 지도를 보고 “고려는 참 볼품없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려는 한반도의 2/3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도로 국한된 “무궁화 삼천리”에서 동북쪽 천리 정도를 싹둑 잘린 2천리 국가가 고려였다. 또한 국사교과서에는 세종이 “김종서와 최윤덕을 보내 4군6진을 개척해서 조선의 강역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넓혔다”는 내용이 나왔다. 이는 현재 대부분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역사상식이다. 그러다가 김종서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내린 명령 중에 이상한 내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은 세종이 김종서에게 이렇게 지시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동북방 땅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말이 전해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공험진)이 장백산(長白山:장백산) 북쪽 기슭에 있다고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세종실록》 21년(1439) 8월 6일)”

 

우리나라의 동북방 경계가 공험진이라는 말이 전해진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 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백두산 북쪽 기슭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북쪽 기슭도 우리나라의 북방 강역이라는 뜻이다. 중·고교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고려강역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윤관이 세운 비석

세종은 아주 치밀한 성격의 임금이었다. 전지 하나를 내려도 자신이 먼저 공부를 한 다음에 내렸다. 강역문제에 관해 지시할 때는 이 문제를 먼저 깊게 공부하고 관점을 세운 후 명령을 내렸다. 세종의 지시는 계속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들으니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공험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가? 만일 길이 험해서 사람을 시키기가 쉽지 않다면 폐단 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깊게 생각하여 아뢰라(《세종실록》 21년(1439) 8월 6일)”

 

세종이 《고려사》를 직접 보고 연구해 보니 윤관이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라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국사를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바쁜 세종이 《고려사》를 직접 보고 김종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고려는 북방 강역을 양계(兩界)로 나누었는데, 양계란 북계(北界)와 동계(東界)를 뜻한다. 세종은 《고려사》 〈지리지〉에서 윤관이 직접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을 보고 김종서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는 동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종 2년(1107) 평장사(平章事) 윤관이 원수(元帥)가 되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는데, 공험진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려사》 〈지리지〉 동계)”

 

공험진 선춘령에 이곳까지 고려의 강역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윤관은 예종 2년(1107) 고려군이 되찾은 강역에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 등의 9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성 선춘령에 ‘고려의 강역이다’라는 뜻의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세종은 김종서에게 사람을 시켜서 공험진 선춘령에 가서 이 비석을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688리

 

공험진 선춘령이 어디일까?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을 써 놓은 《민족문화백과사전》은 고려의 동계(東界)에 대해서 “대체로 함경도 이남으로부터 강원도 삼척 이북의 지역이 해당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 동계의 북쪽 끝인 공험진 선춘령이 함경도 이남에 있다는 것이다. 남한 강단사학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자주 펼친다고 필자가 여러 차례 말했는데, 이 부분도 마찬가지다. 《민족문화백과사전》은 공험진에 대해서 동계와는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민족문화백과사전》은 공험진에 대해서 “예종 때 윤관(尹瓘) 등이 동북여진을 축출하고 개척한 지역에 쌓은 9성 가운데 하나이다.”라면서 그 형성 및 변천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공험진에는 내·외방어소(內外防禦所)가 있었는데, 내방어소는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 자리에, 외방어소는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공험진에 두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공험진’이라는 말이다. 공험진이 함경도 이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두만강의 경원도호부에서 북쪽 공험진까지 정확하게 688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학자들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고 말해왔다.

 

《민족문화백과사전》은 ‘두만강 북쪽 700리’라는 사실을 마지못해 써줬지만 이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남한 강단사학이 지금껏 추종하는 조선총독부 역사관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만든 논리가 내방어소(內防禦所)와 외방어소(外防禦所)라는 개념이다. 고려에서 경원도호부에 내방어소를 두고, 공험진에 외방어소를 두었던 것처럼 말해서 공험진을 고려 강역에서 제외하려고 하는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조에는 “(예종) 3년 무자(1107) 2월에 또 공험진에 성을 쌓고 이택(李澤)을 함주 대도독부사(咸州大都督府使)로 삼아서, 비로소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의 4주(州)와 공험진(公險鎭)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라고 했지 외방어소 같은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조에도 “고려의 대장 윤관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라고 나오지 내방어소 따위도 나오지도 않는다. 무슨 수를 쓰든지 고려 북방 강역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라는 사실을 왜곡하고 축소하기 위해서 설치하지도 않은 내방어소, 외방어소를 설치한 것처럼 우기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반도사관 추종하는 국사교과서

 

《민족문화백과사전》은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 선춘령을 지우기 위해서 온갖 꼼수를 나열한다. 먼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을 끌어들인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윤관의 9성 개척 범위에 대해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길주 이남에 한정된다는 길주이남설과 함흥평야에 한정된다는 함흥평야설을 제기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윤관이 개척한 9성이 길주 이남에 한정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끌어들였지만 그 속내는 이런 논리를 제시하면서 근거로 삼은 참고문헌에 있다. 참고문헌 중에 일본인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윤관정략지역고(尹瓘征略地域考:1920)」과 일본 만주철도에서 편찬한 『만선지리역사(滿鮮地理歷史:1937)』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반도사관에 따라서 고려의 강역을 반도로 축소한 것을 추종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버젓이 있었던 역사강역마저도 지우는 명색의 학자들이 아직까지도 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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