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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블랙 위도우,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하다

㉕ 블랙 위도우 - 케이트 쇼트랜드

 

현재 세계 극장가에서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는 ‘블랙 위도우’이다. 이 영화는 나름 심오한 정치철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근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어벤져스’ 시리즈 상당수가 그렇다.

 

예컨대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이 그랬다.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만든 절대적 인공 지능 울트론이 독단화 되면서 인류에 저항한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이념이나 주의(主義)가 절대화될 때 빚어지는 사회적 참극, 그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워’(2018)와 ‘어벤져스 : 엔드게임’(2019)에 등장하는 타노스(조슈 브롤린)의 존재에서 정점을 찍는다. 타노스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 인류의 반을 죽여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절대 악이다. 그래서 후반으로 가면 꼭 미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로도 느껴진다.

 

이쯤 되면 이 시리즈는 꼭 애들만 보는 마블 영화가 아닌 셈이 된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그토록 찾고자 평생토록 사유(思惟)에 사유를 거듭했던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단 하나의 진실과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가.” 칼 마르크스는 또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딱 하나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정의와 진리의 실체에 대한 다면적인 접근, 다층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블랙 위도우’ 어벤져스의 일원 중 한 명인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만든 일종의 스핀오프(spin-off), 곧 외전(外傳)이다.

 

영화는 나타샤가 로스 장군(윌리엄 허트)의 정부 병력에 쫓기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킬러 엘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가 누군가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상대에게 해독제 가스를 맞고 세뇌 상태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펼쳐진다. 둘은 사실 자매 사이다. 나타샤와 엘레나는 곧 자신들이 다른 킬러들의 표적이 돼 있음을 알게 된다.

 

나타샤와 엘레나 모두 러시아의 최첨단 첩보조직인 레드 룸이 키워 낸 킬러들이다. 레드 룸은 여성 킬러들 모두를, 대뇌학(大腦學) 연구를 통해 개발한 일종의 ‘세뇌 작업’을 통해 조직의 명령만 수행하게끔 스파이들을 길러냈다. 일종의 강철 로봇인 셈이다.

 

나타샤는 이미 여기를 탈출해 어벤져스 팀에 합류했다. 레드 룸의 우두머리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는 그런 그녀를 호시탐탐 제거하려 한다. 나타샤와, 해독제 가스로 정신을 차린 엘레나는 어릴 적 자신들을 양육한 양부모 멜리나 보스토코프 박사(레이첼 와이즈)와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을 찾아가 레드 룸 위치를 알아낸 후 이를 파괴하기 위해 내부로 침투한다. 엄마 멜리나는 대뇌학 선구자이고 사실상 레드 룸 작전의 설계자였다.

 

 

‘블랙 위도우’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는 바로 이 ‘세뇌 작업’에 대한 얘기이다. 러시아 첩보행동 조직의 세뇌 작업은 그 핵심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없애는 것에 있다. 그런데 멜리나 박사는 혹시 하는 마음에서 해독제를 만들어 놨고, 이 가스를 맞으면 인간에게 다시 자유의지가 생기게 된다. 아주 우스운 얘기 같지만, 여기에는 과거 소련 제국이나 그에 준하는 국가 체제 혹은 사회가 왜 붕괴하게 되는지를 마블 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연방(聯邦)이라고 불리는 국가나 그렇게 의도적으로 국토와 사회의 이념을 병합해 낸 국가들 대부분은, 블랙 위도우의 가족들 나타샤·엘레나·멜리나·레드 가디언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의사(擬似) 가족국가’로서의 한계를 지닌다.

 

영화 속에서 딸 둘이 스파이로서 성장하는 과정과 그걸 체제에 일임하는 양부모의 모습은 소 연방의 구성 과정과 1990년대에 이르러 그 결속이 급속도로 해체되던 과정을 은유하는 듯이 보인다. 이념으로는 연대했지만 연대감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던 ‘가족=국가’가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었다.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구권 국가들이 해체 독립 과정에서 몸살을 앓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95년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노선의 차이로 등장한다. 인류 사회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넘어간다는 구조주의적 결정론에 따르면 다른 얘기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냥 그 같은 사회적 법칙에 따르고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 소련이 과거 기계주의적 유물론과 전체주의적 사고관에 빠져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실패한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창의력’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사회는 대체로 소수 정치 엘리트들이 독단과 독선, 독재의 행태를 저지른다.

 

 

‘블랙 위도우’는 러시아의 첩보기관 레드 룸을 통해 과거 소련의 사회가 왜 붕괴할 수밖에 없었는지, 한편으로는 미국 역시 그 같은 권력 독점의 방법론에 매료돼 왔었음을 고백하고, 그것이 이른바 미-소 냉전이나 이후의 미-러시아간 대립으로 이어지는 역사임을 ‘돌아돌아’ 보여주려 한다.

 

그런 이면의 얘기가 매우 흥미롭다.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조차 영화라고 하는 것이 당대의 정치경제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전의 영화 ‘블랙 팬더’도 1960년대 미국의 신좌파 운동을 주도했던 블랙팬더당의 이상과 실패를 우회적으로 그려낸 내용이었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전편이 여성성의 절대적 존재감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나타샤와 엘레나는 물론, 진화된 인물 모두가 다 여성이다. 대뇌학 전문의 박사도 아빠(남자)가 아니라 엄마다. 위도우들, 최악의 빌런(악당)인 태스크 마스터, 곧 안토니아(올가 쿠릴렌코)도 여자다. 영웅이든 악당이든 다 여자다.

 

이그젝티브 프로듀서(투자기획자)는 주인공 역의 스칼렛 요한슨 본인이고 감독인 케이트 쇼트랜드는 호주 출신 여성이다. 영화 내용이 됐든, 자본이 됐든, 그것을 운용하는 시스템이 됐든, 세상의 많은 일들의 주도권이 여성으로 이전됐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와 페미니즘, 이 두 가지가 영화 ‘블랙 위도우’의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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