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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까망이 3

 

까망이와의 이별은 빨리 찾아왔다. 형이 확정되자 이감 통보는 하루 전에 이루어졌다. 나는 보안과장에게 가서 까망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주장했지만 내 목소리는 높지 못했다. 모 재소자가 자신이 키우던 앵무새를 데리고 이감 간 케이스가 있기는 했다. 그 재소자는 무기수였다. 내 저항은 허무하게 끝났다. 나는 터덜터덜 돌아와서 짐을 쌌다.

 

나는 까망이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까망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까망이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제 까망이는 8개월이 지나서 제법 몸집이 커졌다. 나는 까망이를 내 가슴 위에 올려두고 같이 잠을 청했다. 까망이 숨소리를 더 많이 기억하고 싶었다. 까망이는 사지를 쭉 뻗어서 코를 내 턱에 박고 가르릉 소리를 냈다.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 새벽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까망이가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까망이 뒷발을 살짝 잡았다.

 

“가지 마. 바보야, 나, 간다고….”

 

까망이가 내게로 와서 혀로 얼굴을 한번 핥더니 이불을 젖히고 나갔다. 이내 식구통 너머로 사라졌다.

 

짐은 단출했다. 그간 보던 책은 전부 집으로 부쳤다. 더블백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특사 동지들의 배웅을 받고 보안과로 향했다. 다행히 까망이는 보이지 않았다. 특사 복도 끝에 도착하여 보안과로 가는 문을 열 때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때 까망이가 죽을 듯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꺄아옹’ 소리내며 풀썩 뛰어올라 내 품에 안겼다. 몹시 떨고 있었다. 발톱을 세워 내 가슴에 깊이 박았다. 가슴이 발톱에 찍혀 따끔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까망이는 내가 강제로 목욕시킬 때 보다 더 심하게 저항했다. 한사코 나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특사에서 같이 징역살이하던 후배에게 겨우 까망이를 넘기고 나는 돌아서 나왔다. 까망이는 계속 울었다. 이 상황이 무엇인지 까망이는 알았을까?

 

나 혼자 태운 작은 호송차를 타고 춘천교도소로 왔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밥을 먹었다. 그때는 호송줄과 수갑을 풀어주었다. 귓전에서 계속 까망이 울음소리가 웅웅거렸다. 나는 우울했다. 춘천이 다 와 가는데 호송하던 교도관이 말했다. “여기가 지존파 애들이 외제 차 타는 부자들 납치한 곳이다”라고 말했다. 눈을 들어 밖을 보니 멋진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 안의 시퍼런 물이 까망이 눈을 닮았다.

 

춘천교도소는 광주교도소에 비하면 곱 징역이었다. 징역살이는 힘들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통방이 되지 않았다. 나는 오직 달리기만 했다. 1.75평 독방에서도 계속 달렸고, 하루 30분 운동 나오면 미친 듯이 달렸다. 까망이가 몇 번 꿈에 나타났다. 악몽이었다. 까망이가 좁은 창살 틈을 비집고 나에게로 들어오려 했다. 그러나 창틈이 너무 좁아서 머리는 통과했지만, 몸이 빠져나오지 못해 버둥거렸다. 나는 까망이가 숨이 막혀 나를 애타게 쳐다보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가위눌려 꿈에서 깨어났다. 이불이 전부 땀에 젖었다.

 

이감 이후 나는 까망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징역살이를 마치고 출소해서도 까망이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 징역살이는 훈장이 아니었다. 출소를 환영해주는 동지는 없었다. 나는 조직도 후원자도 없었다. 나에게는 이제 까망이가 아니라 아내와 곧 돌을 맞이할 내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할 가장의 어깨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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