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햇볕이 따가워지면서 산에는 풍년이다. 뒷산에 오르면 잘 여문 도토리와 밤이 누렇게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탐내는 사람이 없다. 도토리는 특별히 잘 열리는 해가 있는데 몇 년 전 도토리와 밤이 정신없이 열렸었다. 산책할 때마다 주었더니 꽤 되었다. 그것으로 고향에서 했던 것처럼 도토리묵을 만들어 보려 시도했다. 오래전 일이라 제대로 될 리 없지만 도토리에 생명줄을 걸었던 고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향에는 도토리가 열리는 떡갈나무 종류의 참나무가 많다. ‘도토리 키 재보기’라고 하지만 도토리라고 다 같지는 않다. 도토리는 종류에 따라 길쭉하고 통통하고, 크거나 작고, 여러 가지가 있다. 일찍 내리는 도토리도 있고 늦게 떨어지는 것도 있어서 9월부터 눈이 내릴 때까지 있다. 바람이 불면 도토리가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내린다. 잘 열린 나무를 만나면 순간에 가져온 용기에 가득히 채울 수 있다. 잘 열린 나무를 발견하려고 사람들은 새벽부터 일찍이 산으로 오른다. 사람이 흩고 지나간 곳을 다른 사람이 지나고 숱한 사람이 줍고 있어도 도토리는 계속 내린다. 그곳의 도토리가 다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고향에서 도토리는 곡물과 같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주식이었던 강냉이(옥수수) 가격과 거의 비슷하거나 더 높을 때도 있다. 도토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국가는 개인들에게 도토리 할당량을 주어 거두어갔다. 할당량을 채우려고 산으로 가기도 하지만 도토리가 식량 대용이 되므로 시장에는 수요자가 많다. 도토리는 날것으로 그냥 두면 벌레가 빨리도 생긴다. 눈이 내리기 전에 많은 양을 확보하고 오래 보관하려면 가마에 쪄내어 말려야 한다. 삶은 도토리를 가을 햇볕에 바짝 말려 껍질을 없애고 잘 다듬어진 도토리는 상품이 되어 시장으로 나간다.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있는 도토리는 떫은 맛을 제외하고 맛도 부드러워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도토리국수는 강냉이나 밀가루를 섞어 만든다. 기계로 뽑은 국수는 색깔이 까맣고 윤기가 난다. 도토리 국수는 온면보다는 냉면이 좋다. 차가운 김치 국물에 말아먹으면 도토리향이 배어 있어 독특한 향취를 낸다. 곡물을 섞어 지짐(부침개)이나 송편, 떡, 뜨더국(칼국수)등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도토리는 강냉이처럼 거칠지 않고 부드럽기 때문에 감자처럼 삶아서 뭉개어 설탕을 넣고 주먹밥처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도토리로 빚은 술은 아주 맑고 맛도 좋다. 다른 것에 비해 발효도 잘되고 알콜도 많이 나온다. 묵은 전분을 만들고 떫은 맛을 제거하려면 시간도, 손도 많이 가는 음식으로 자주 해 먹지는 않았다.
지금은 도토리를 밞고 지나다닐 정도로 풍요로워졌다. 가난한 시절 먹었던 그때처럼 먹으려 해도 그 맛이 아니다. 한 알이라도 얻으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십여 리 길을 걸어다니고, 가랑잎을 뒤지던 기억도 이제는 잊혀져간다. 그러나 새벽이슬에 반짝이는 도토리가 수북이 내린 나무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떨림은 그대로 있어 가끔은 허리 굽혀 줍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