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3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기상청 제공

[오세훈의 온고지신] 아나톨리 김

 

선생은 당대 러시아 소설가로서 대문호 톨스토이와 솔제니친 등을 잇는 현존 최고의 작가다. 1939년생으로 여든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정력적으로 쓴다.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미술대학, 고리끼 문학대학에서 공부했다.

 

6공 때 한-러 수교 덕분에, 1989년 9월, 세계 한민족 체전 참가자의 일원으로 우리 정부가 보낸 전용기를 타고 '조국' 땅을 밟는다. 100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는 돌아가면서 친구 인 번역가 김근식 교수에게 자신의 뿌리를 확인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 얼마 후 실로 경천동지 할만한 편지를 받게 된다.

 

"고개 숙여 존경하는 시인이여! 


이렇게 하여 나는 당신의 후예임을 알아내고 한없이 기뻤습니다. 이제 내 운명에서 풀리지 않았던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의 결심과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왔던 나는 결국 많은 면에서 당신의 길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 놀 라운 소식에 형언키 어려운 기쁨을 느끼면서도 어이하여 나는 울적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일까요?"

 

김시습이 아나톨리 김의 17대 직조(直祖)였던 것이다. 이 문장은 선생이 당시 한 일간지에 기고했던 에세이 "나는 한국인인가, 러시아인인가?"의 첫대목이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울컥했다. 길고 크게 전율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도 그 감탄 그대로다. 피는 못 속인다. 나는  그때 족보학이 정밀과학임을 깨달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생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중앙대에 노문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장기체류 기회를 얻었다. 이 기간 동안 조상이 떠돌며 머물렀던 곳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매월당 방랑 코스'를 답습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자부심을 유산으로 갖게 되었다. 선생은 그 가치를 '조상의 음덕'이라고 말한다.

 

선조가 1435년생이고, 후생이 1939년생이니 이 희대의 천재 조손간(祖孫間)은 500년 굴곡진 세월이 쌓은 진귀한 문화사(文化史)의 퇴적층이 되었다. 조상은 이 좁은 땅 방방곡곡을 통한을 달래며 방랑했고, 후손은 민들레 홀씨 되어 저 멀리 날아가서 이 세상 절반의 땅 한가운데 우뚝 선 것이다. 큰 빛으로.

 

 

그는 1973년 단편 '수채화'로 등단, 1993년 소설 '다람쥐'로 톨스토이 문학상, 모스크바 예술상을 수상하며 정상에 오른다. 1995년부터 2년 동안 톨스토이 재단에서 발간하는 문학잡지 '야스나 폴랴나'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작품들은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솔제니친 이후, 러시아 문학에 노벨상이 주어진다면 선생이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 한다.

 

이 글을 대통령 후보들, 특히 윤석열이 읽으면 좋겠다. 역사의식과 그에 걸맞은 품격으로 경쟁하는 걸 보고 싶다. 나의 기대가 지나친가. 씨름은 힘과 기술이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정치는 문사철(文史哲) 앞에서 겸허함으로써만 성공한다. 그대는 지금 그 철칙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네티즌 의견 16

스팸방지
0/300자
  • scy7469@naver.com
    • 2021-11-17 01:25:54
    • 삭제

    깝죽대는 맛으로 사는 윤에게 너무나 과도한 요구인 거 같습니다.

  • 푸른사슴
    • 2021-11-15 22:25:13
    • 삭제

    법전만 읽고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 역사의식도 부재하니 대략난감이 아닌가 합니다
    생가거리를 던져주어 항상 감사하오~~

  • 김재진
    • 2021-11-11 20:08:20
    • 삭제

    문사철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자들이 판검사들 아닌가 합니다. 교과서 외에 기에는 달인
    그런자들이 세상사의 잣대를 만들고 들이대겠다는 다닌다는 세상 통탄할 일입니다

  • 졸라반골
    • 2021-11-11 05:15:42
    • 삭제

    오교수님의 혜안에 감동합니다
    대선국면에 몽매한 민초들의 바른 선택을 위해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 우보
    • 2021-11-11 00:15:43
    • 삭제

    ......
    근조

  • 강대표
    • 2021-11-10 18:10:55
    • 삭제

    품격과 겸허함을 겸비하라는 말씀이신데,
    에휴~~ 바랄 걸 바라야지요 !
    체육선생님에게 영어와 수학,사회문화과목을 잘 가르쳐 주길 바라는 이웃들.
    게다가 틀림없이 잘 가르칠 수 있다고,주변에까지 설파하는 일부 이웃들.
    내로남불은 절대로 안 하겠다는데.
    내가 지금 아는 그 일들은 ...?
    검사로서 내가 한 일은,
    사모님께서 하신 일은,
    또 그 유명하신 분이 저지르신 일등등은...
    '내로남불'의 語意를 내가 잘 못 알고 있나보다 ㅠ
    옳은 게 옳은 거고,틀린 게 틀린 건데.
    오늘의 나는 혼란스럽다.
    나만 그런걸까 ?

  • 우주희
    • 2021-11-10 17:31:34
    • 삭제

    가뭄에 단비 같은 글을 이렇게 자주 읽을 수 있어 정말 좋아요~~

  • SSc 놀이터
    • 2021-11-10 14:07:53
    • 삭제

    동감입니다.

  • 야옹이
    • 2021-11-10 12:59:08
    • 삭제

    조상의 음덕~ 결국은 뿌리를 찾는 길을 가게 됩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얼마나 자신의 정체를 찾아 왔을지요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 비비아이
    • 2021-11-10 12:55:42
    • 삭제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윤석열에게는 지나친 기대를 하십니다. 제가 아는 최악의 인물입니다.






배너


COVER STORY